제14장 고베로 진격하다

제 14장 고베로 진격하다

기본 사항

사용자 국가 - 소속

조선 - 조선군

브리핑 참여자

김덕령, 김시민, 유성룡, 이순신

사용 장수 목록

초기 참전 장수
(지급 아이템)

파일:SYW2PLUS_General_Gim_Simin.png

파일:SYW2PLUS_General_Table_Blank.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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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

 

 

 

 

 

후발 참전 장수
(지급 아이템)

파일:SYW2PLUS_General_Gim_Deokryeong.png

파일:SYW2PLUS_General_I_Sunsin.png

파일:SYW2PLUS_General_Table_Blank.png

김덕령

이순신

 

 

 

 

기타 지급 아이템

(해당 없음)

상세 사항

격전 지역

고베

임무 목표

1. 농부를 보호하라(김시민은 살아야 한다).
2. 적 진영을 섬멸하라(이순신, 김덕령, 김시민은 살아야 한다).


처음 시작할 때 명이 이상하게 참전하지 않는다 해서 조선 혼자 공격을 가기로 하는 미션. 명의 낌새가 묘하다는 떡밥을 뿌린다. 그런데 이 미션 이후에 21장에서... 시작하면 봉화대에서 신기전 망루 업그레이드를 하자. 사실은 하지 않아도 무방하나, 그래도 신기전 망루 한두 개 정도 지어주면 더 편하게 깰 수 있다. 

동맹군 농부가 시작하자마자 천천히 걸어가는데 그냥 농부가 가는 길을 한참 앞서가서 병력으로 다 쓸어버리자. 다행히 적이 뒤에서 나타나 농부를 습격하는 일은 없다. 농부들을 안전하게 보호한답시고 그들과 자신의 병력들을 부비적거리면서 진행하게 되면 간혹 농부가 접어드는 길쪽의 왼편에 있는, 반대편이 막다른 언덕길로 들어가 끄트머리에서 끼어버림으로써 더 이상 임무 자체를 진행할 수 없게 될 수도 있으므로 절대 바짝 붙으면서 진행하면 안 된다. 이 경우에는 눈물을 머금고 메뉴에서 다시하기를 눌러야 한다. 

농부들은 맵 중앙쯤에 도착하면 본영과 방앗간 등의 건물을 짓는데 이것들이 다 완성되면 비로소 우리 건물이 된다. 그 후 방어만 하며 기다리면 이순신이 많은 원군을 이끌고 도착한다.
이때 유성룡은 히로시마에서 뒷정리를 하고 있어서 합류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적이 너무 약하므로 이순신이 데려온 병력과 뽑아놓은 병력으로 9시를 무난하게 밀고 12시로 향하면 된다. 원군에 화차가 있지만, 이 미션에서는 별도로 화차를 더 추가 생산할 수는 없다. 12시 진영의 적이 공격기로 종종 찔러대서 조금 귀찮은 것 빼곤 딱히 어려울 게 없다. 창고를 본영 위쪽에 지을 경우, 신기전 망루를 지어도 적 공격기가 아슬아슬하게 잘 안닿는 범위에서 나무하는 농부를 공격하기도 하므로 창고는 너무 위에 짓지 말도록 한다.

허준 등용 연구가 미리 완료되어 있기 때문에 농부가 본영과 방앗간을 모두 건설한 후에 바로 훈련하여 투입이 가능하다. 스토리상에는 전혀 개입하는 부분이 없다. 아군 유닛의 치료를 위해서나 전비 최대량을 늘리기 위해서나 사실상 반드시 뽑는 것이 권장되지만, 어쨌든 뽑건 말건 플레이어의 자유임과 동시에 이벤트나 트리거 따위를 통한 시나리오 상의 자발적인 등장은 아니므로 상단의 표에서는 참전 목록에서 제외한다.

그리고 영상에서 보면 이순신이 레벨8로 나타난데다가 대사가 틀리다.

이 미션만 그런게 아닌 바로 이 글을 쓰는 4월 28일이 이충무공 탄신일이기 때문이다. 그 날 하루만큼은 이순신의 레벨이 8에다가 대사도 틀려진다. 대사는 대략 오늘이 제 생일입니다. 생일 선물은 준비하셨는지요? 이런 말을 한다.

마지막으로 허준에 대해 알아봅시다.


조선 역사에 길이 남을 명의.

한국 한의학 발전의 지대한 공헌자.

조선 중기의 명의의 제자. 자는 청원(淸源)이고 호는 구암(龜巖)이다. 본관은 양천으로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등촌2동)에서 출생한 걸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서지학계(서지학자 이양재씨 주장)를 중심으로 경기도 대강면(현재 파주시)에서 출생했다는 학설이 등장해 논란 중에 있다.
양천허씨 시조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상우수사를 지낸 허곤(許琨)이며 아버지는 용천부사를 지낸 허륜(許碖)이다. 어머니는 허론의 소실 영광 김씨다. 이복형으로 허옥(許沃)이 있으며, 바로 아랫동생인 허징(許澂)은 같은 어머니가 낳은 동복형제로, 허준은 허륜의 차남이다. 일단 허준이나 허징은 족보에는 서자로 표기되어 있다. 허징도 형 못지 않게 비범한 인물로 서자이면서도 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시절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의 딸과 결혼까지 한다. 서얼은 과거시험 못본걸로 아는데 허징은 얼자는 아니라서 문과에 응시한거요??

소설 동의보감 등에서는 그가 서자라서 설움받고 가난하게 지내며 경상도의 명의 유의태에게 의학을 배웠다고 나오나 이는 어디까지나 소설상의 이야기일 뿐이다. 애초에 '유의태'라는 사람은 가공인물이고, 그 모델이 될듯한 유이태라는 인물은 한참~(150년뒤 숙종대)후 의 인물이다. 허준이 어디서 어떻게 의학을 배웠는지는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 알 도리가 없다. 아예 처음부터 서자가 아니고 후대의 족보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주장도 소수 있지만 이를 확실히 입증할 만한 물증은 없다. 따라서 서자였다는게 중론인데 서자라고 유별나게 차별받거나 가난하게 사는 그런 환경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허준의 집안이 서자를 강하게 차별하는 집안이라면, 같은 서자인 허징이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위에 언급한 화려한 대접을 받았을 리가 없다. 즉 집안에서의 좋은 대우+본인들의 재능이 겹쳐서 성공했다는게 정설.

선조대의 관료이자 학자인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의하면 1569년에 유희춘 자신이 허준을 이조판서 홍담에게 내의원에 천거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기록이 있고 1573년에 정3품 내의원정에 올랐다는 것으로 보아 1569년에 내의원에 들어간 것으로 보여진다.

1575년부터 선조를 진료하는 의원이 되었고 1578년에는 내의원 첨정에 올랐으며 1587년에는 어의 양예수와 함께 선조를 치료하여 호피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1590년에는 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하여 그 이듬해에 당상관에까지 오르게 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의 곁을 떠나지 않고 모셔서 전후 호성공신 3등에 제수되었다. 게다가 임진왜란에는 류성룡,이덕형,이항복,이원익,이산해와 더불어 피난가지 않고 자진해서 조정에 남아 선조를 모셨다이씨가 왤케 많아 드라마 등에서 의료기록을 빼내서 늦게 선조에게 도착한 탓에 선조가 삐쳤다는 내용은 창작이라 보면 된다.

1596년에는 광해군의 천연두를 고쳐 종2품의 가의대부에 제수되었다. 이 때부터 선조의 명으로 조선의 실정에 맞는 의서편찬 작업에 착수하였다.[1]그러나 정유재란 발발로 중단했다가 1600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편찬을 할수 있게 되었다. 1606년에는 양평군에 제수되고 정1품 품계인 보국숭록대부까지 오르게 되었지만 중인에게 너무 높은 직책이라는 대간들의 반발로 제수가 잠시 보류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품서용 원칙이 적용되는 잡과 급제자는 정3품 당하관이 승진의 끝이다. 게다가 허준을 제외하면 잡과 출신으로 정1품까지 승진한 사람은 조선시대 500년을 통틀어 역관 출신인 오경석이 유일하다.

게다가 오경석은 개화기 직전의 사람이다. 즉 선조, 광해군(1500년대 말 1600년대 초)때 활약한 허준이 최초가 된다. 어찌 되었든 중인의 몸으로 정1품에 오르는 것이 논의될 정도이면 허준이 엄청 대단한 것이 맞다. 아무리 지체 높은 명문가의 자제라고 해도 정1품에 오르기 위해서는 엄청난 능력과 처세, 심지어 운까지도 겸비되어야 하고, 그조차도 바늘구멍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중인이 그 자리까지 오르는 것이 얼마나 극악의 난이도일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2] 현대로 비유하자면 9급 공무원 출신이 총리까지 승진하는 수준.

당시에도 백성들 사이에서 허준의 입지전적인 출세 스토리는 굉장한 화제가 되었다고 하며, 이것이 백성들 사이에 계속 회자되면서 허준 설화가 전국 곳곳에서 전해지는 계기가 된다. 이런 허준과 관련한 설화 혹은 전설들이 우리가 아는 소설과 드라마의 소재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1608년에 선조가 사망하면서 어의인 그는 책임을 지고 귀양을 가게 되었다. 원래 왕이 승하하면 책임을 맡았던 어의는 형식적으로 귀양을 갔다가 곧 풀려나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곧바로 풀려나서 광해군의 어의가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1610년에 "동의보감"의 편찬을 완료했다. "동의보감"은 당시의 조선과 중국의 모든 의서를 참고하고 허준의 연구가 더해져서 완성된 의학백과사전으로 나오자마자 조선, 청나라일본에서 엄청난 히트를 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청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람들마다 북경의 서점에서 "동의보감"이 팔리고 있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다.

이후 각종 의서 편찬에 매진하였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나라의 재건을 위한 의학자로서의 노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615년에 77세로 사망하여 생전에 보류되었던 정1품 양평부원군 보국숭록대부에 추증되었다. 허준의 직계 자손들은 현재 북한에 거의 남아 있어서 자세한 파악이 되어 있지 않다.

동의보감과 다른 한 권을 제외하면 전부 전염병 관련 저작이다. 드라마에서는 침술의 달인으로 곧잘 나오지만 실제로는 역병의 예방 및 치료가 주 분야였다. 실제로 실록에서도 허준 본인이 선조에게 직접 소신은 침 놓는 법을 모르옵니다라고 폭탄 발언(?)을 한 기록도 있다.

이 이르기를 "침을 놓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니, 허준(許浚)이 아뢰기를,
"증세가 긴급하니 상례에 구애받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 차례 침을 맞으시는 것이 미안한 듯하기는 합니다마는, 침의(針醫)들은 항상 말하기를 ‘반드시 침을 놓아 열기(熱氣)를 해소시킨 다음에야 통증이 감소된다.’고 합니다. 소신(小臣)은 침 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마는 그들의 말이 이러하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 허임[3]도 평소에 말하기를 '경맥(經脈)을 이끌어낸 뒤에 아시혈(阿是穴)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하였다. - <선조실록> 선조 37년(1604년) 9월 23일


물론 침의가 따로 있으니 겸양의 의미겠지만 주 전공은 아니었던 것. 그렇다고 해서 허준이 침술에 아주 문외한이란 뜻은 절대로 아니다. 당대에 침술은 의관이라면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하는 기본 기술이었다. 굳이 현대 의학으로 비유하면 실력있는 내과 전문의가 외과 수술 실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물론 당시의 침술이 현대의 외과 수술과 같은 것은 아니니 주의.) 

허준의 묘는 경기도 파주시 진동면에 위치해 있다. 아쉽게도 이곳은 민통선 지역이라서 방문하기는 쉽지 않다. 위치가 위치라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1991년에야 발견되었는데, 발견 당시에는 봉분과 석물이 묘임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방치된 상태였으며 묘비도 두 동강이 났을 정도[4] 로 상당히 훼손된 상태였었다고 한다. 다행히 묘비에 그의 묘임을 알리는 '허준', '양평군', '호성공신'이라는 표기가 남아 있어서 허준의 묘로 판명될 수 있었다. 

2009년, 동의보감이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다만 등재 이후 '의서로서는 세계최초' 같은 보도기사가 나왔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타밀 의료기록 모음집과 디오스쿠리드 필사본 등의 의학서적이 이미 199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세계기록유산 등재만 해도 광영인데 괜히 사족을 붙였다가 찬물을 끼얹는 케이스. 물론 이것이 동의보감의 역사적 가치를 깎지는 않는다.

다만 명심해야 할 것은 위에 나와 있듯이 동의보감은 선조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편찬되었단 것이며, 허준의 단독저작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공동 작업으로 당대의 여러 명의들이 왕실 서고와 민간에 떠돌던 수많은 의서들을 참고하여 제대로 된 것을 추려내고 자신의 의학관과 경험을 첨가하여 작업한 것이다. 오늘날 허준의 단독저작인냥 취급받는 것은 전란으로 어의들이 모두 흩어지며 중지된 작업을 전쟁 후 허준이 마무리 한 덕이다.

허준이 해부할 시체가 부족해서 제자들을 해부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당연히 사실이 아니니 믿지 말자. 당장 허준은 임진왜란을 겪은 인물이고, 비록 근왕을 해서 직접 전화에 휩쓸리지는 않았다고 하나 역병이나 기아로 인해 시체를 접할 기회는 충분히 많았을 것이다(....). 또한 허준은 내의원 소속의 의관인 만큼 제자를 두었다면 당연히 주변에 소문이 퍼졌을 텐데, 그런 사람의 제자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면 당대에도 상당한 이슈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당연히 그에 관련된 기록은 없다. 무엇보다 조선 사회는 유교 사회이며, 학파로 당파가 갈릴 정도로 사제관계가 중요시되는 사회에서 허준이 제자를, 그것도 해부 목적으로 살해했다는 것이 기록으로 남을 정도로 사실이었다면 현재 동의보감의 저자는 허준일 수가 없을 것이다.


Posted by 동네 오락실 구경하던 형 [동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