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를 무사히 방어한 서군은 이 기세로 곧바로 도쿠가와의 본성인 교토 앞에 있는 기후성으로 진격한다.
9시 보라색이 자주 보내는 카미카제와 처음부터 쳐들어오는 12시 진영의 세이쇼오를 주의할 것. 세이쇼오는 건물과 기갑에 강한 지진을 사용하기 때문에 주의해야한다. 세이쇼오가 아이템을 떨어뜨리면 못 쓰는 건 주워서 내다 팔자. 우선 귀갑차 + 조총병만 모일때까지 버텨주고, 적당히 모였다 싶으면 순회공연을 돌자. 어디부터 공격할지는 플레이어가 선택하자. 그 외에는 수비할 때 망루를 귀갑차로 감싸도 좋다.
여담으로 당시 기후를 다스리던 다이묘는 오다 노부나가의 손자인 오다 히데노부로 서군 소속이었다. 즉, 내전을 벌인 셈이다.
오다 히데노부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자.
오다 히데노부(일본어: 織田秀信, 1580년 ~ 1605년6월 24일)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의 무장, 기리시탄 다이묘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적장손이자 노부나가의 장자인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의 적장자이다. 아명은 산보시(三法師)이며 사부로(三郎)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기후(岐阜)의 성주이자 동시에 조정의 관위가 중납언(中納言)이었던 연유로 기후노 중납언(岐阜中納言)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일본의 사료인 『공경보임(公卿補任)』에는 다이라노 히데노부(平秀信)로 기록되어 있다. 세례명은 페드로이다.
생애
덴쇼 8년(1580년) 오다 노부타다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덴쇼 10년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당시 조부 노부나가와 부친 노부타다가 모두 주살되면서 마에다 겐이(前田玄以)의 보호 하에 본래의 거처인 기후 성에서 기요스 성(清洲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같은 해, 기요스 회의에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의 추대를 받아 노부나가의 또 다른 중신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의 지지를 받던 숙부 노부타카(信孝)를 제치고 3세의 나이에 오다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직할령은 오미 국(近江国) 사카타 군(坂田郡) 3만 석이었으며 나이가 어려 친정이 불가능하였으므로 호리 히데마사(堀秀政)가 영주 대리를 맡았다. 덴쇼 16년(1588년) 이름을 오다 사부로 히데노부(織田三郞秀信)로 바꾸며 성인식을 치뤘는데, 이 때 이름 중 ‘히데’(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따왔으며, ‘노부’는 조부인 오다 노부나가에서 따왔다.
산보시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오다 가문의 가신들을 압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기세를 몰아 교토의 조정으로부터 관백의 지위를 받아내었으며 관백의 지위를 이용하여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군사행동 및 세력 다툼을 금지하는 내전 금지령을 교토 조정(일왕령) 이름으로 포고함으로써 전국의 다이묘들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권위에 굴복하게 하였다. 그럼으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더이상 오다 가문의 후계자인 산보시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이 필요없게 됨에 따라 산보시는 자연스럽게 일개 소 지방의 성주 가문(오다가문)의 산보시가 되었으며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일개 소 지방의 세력가로서 서군의 이시다 미쓰나리의 편에 가담하였다가 몰락하게 된 것이다.
한편 오사카에서 나고야가 가토에게 습격당할 것을 예상한 고니시는 군량을 미리 옮겨 놓고 동군이 오사카로 진격해 오고 있다고 미츠나리에게 보고한다.
귀갑차의 등장 미션. 해당 사실을 강조한 이유는, 일본 미션은 조총병을 태운 귀갑차만 모아서 어택땅만 찍으면 웬만한 경우에는 모두 쉽게 이기기 때문이다. 일반 멀티플레이 게임에서는 시장을 짓고 자원 가치 향상 업그레이드까지 해야 귀갑차 생산건물을 지을 수 있으므로 바로 귀갑차를 모으기 힘들 뿐더러, 본 게임은 초반 유닛의 생산속도가 미칠 듯이 빠르므로 패스트 귀갑차는 카운터를 맞을 위험이 큰 도박성 있는 전략이다. 숙련된 플레이어들 중에는 영웅 스킬로 짤짤이를 해대고 도망다니며 병력을 갉아먹는 컨트롤이 가능한 수준의 플레이어들도 존재하기 때문에 해당 전략이 더욱 쉽지 않으며, 여기에 마법력이 굉장히 빨리 회복되는 게임의 특성상 실현하기가 더욱 성가시다. 하지만 컴퓨터 인공지능은 사람처럼 악랄한 견제플레이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귀갑차들을 모아서 공격하기 매우 용이하다. 다만 주의할 점은 마지막 패치를 기준으로, 원거리 유닛들은 미스 판정이 자주 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수가 모이기 전까지는 위력이 다소 모자랄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모으면서 개체 수를 잘 유지해야한다는 점이다. 모든 기반 시설을 처음부터 건설하기 시작해야하는 멀티플레이 게임과는 달리 시나리오의 경우에는 미션을 거듭할수록 처음부터 여러 고테크의 건물들이 미리 지어져 있기 때문에, 귀갑차의 생산이 쉽고 빠르다. 조총병과 와키자카를 태운, 철갑탄 업그레이드를 한 귀갑차의 위력은 기관총에 준할 정도로 절륜하다.
시작하자마자 우측의 망루 4기 중 맨 위에 있는 망루를 제외하고 전부 해체시키고 자원 가치 향상 연구를 한다. 그 후 방어는 주어진 유닛만으로 진행하며 망루 해체를 통해 얻은 3기의 건설수레로 전부 대장간을 짓고 귀갑차만 뽑는다. 3시의 방비 상태가 워낙 허술하기도 하고 곡물이 풍부한 곡창 지대이기 때문에 먼저 섬멸하여 해당 지역을 확보하는 것이 좋다. 다만, 이 3시 지역은 시간이 지나면 노랑색 세력의 도쿠가와, 가토를 포함한 적들이 쳐들어오니 주의해야한다.
총병에 대한 격려 버프 효과가 강력한 와키자카 등의 영웅을 귀갑차 하나에 넣어주거나 같이 동반하여 귀갑차로 순회공연을 다니면 끝난다. 풍백술의 위력이 사기적이지만 굳이 업그레이드를 안 해도 쉽게 깰 수 있다. 그래도 상인이 폭마혈도를 들고 오면 꼭 사주자. 싸울 때 고니시로 들어가서 폭뢰격을 갈기면 건물들이 죄다 박살나서 플레이 타임을 크게 단축시켜줄 것이다. 컨트롤에 자신 있으면 바쁘게 움직이면서 풍백술도 써주면 더 좋지만, 굳이 그런 수고를 할 필요도 없이 쉽게 끝낼 수 있다.
귀갑차의 장점 중 또 하나를 들어보자면 영웅을 귀갑차에 태우고 다닐 수 있어서 피관리를 하기 쉽다는 것도 플레이 타임 단축에 도움이 된다(안정적인 영웅의 격려 버프는 덤). 조반 영웅은 워크래프트 3과는 달리 극초반부터도 적을 잘 죽이지만, 성장이 꽤 되기 전에는 워크래프트 3보다 더 잘 죽기도 한다. 극단적으로 공속이 빠른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니시는 평소엔 귀갑차에 태워서 다니다 타이밍 좋게 내려서 폭뢰격만 갈겨줘도 된다.
또한 귀갑차에 조총병이나 와키자카를 태우면 공격속도가 빨라지고 공격력이 10씩 올라가는데, 이 때의 공격 속도 상승량이 자비가 없다. 보유하고 있는 조총병들을 쓸데없이 위험에 노출시켜서 낭비하지말고 생산하는 대로 귀갑차에 태우고 다니는 것이 좋다.
여기서도 다시금 도쿠가와와 가토가 고니시의 지략을 찬양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미츠나리는 이런 생각(빈 군량고로 낚시)을 할 위인이 못된다며 미츠나리를 까면서 역시 고니시라는 식으로 말한다. 다만 서두르면 이 대사를 보기는 어려우며, 적당히 시간을 끌 필요가 있다. 참고로, 가토의 미션상 대사는 여기서 끝.
일본의 성 중에서도 가장 큰 편에 속하기 때문에 주위를 한 바퀴 도는 것만 해도 지칠 수 있다. 오사카 성의 전시자료에 따르면 현재의 오사카 성이 에도 막부에 의해 상당 부분 축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로 축소되었다고 가정하면 실제로는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오사카 성 부지에는 원래는 정토진종(淨土眞宗)[1]의 본산지인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願寺)가 있었다. 혼간지 세력은 천험의 요새를 구축하고 다이묘에 맞먹을 정도로 힘을 키웠으며 잇코잇키를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에 대항하였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와의 10년에 걸친 지리한 전투 끝에 이곳을 내주고 옮겨가는 조건으로 종전에 동의했다. 이 시점에 이시야마 혼간지는 불타 사라진다.
오다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고 여기에 성곽을 건설하여 자신의 거점으로 삼았다. 히데요시가 건설한 오사카 성은 지금 남아있는 오사카성과는 다른 것으로, 훨씬 규모가 큰 성이었다. 대규모의 이중 해자가 성을 보호하고 있었다. 히데요시 사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은 후에도 오사카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요토미 가에 충성하는 세력의 본거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도요토미와 도쿠가와가 격돌한 1615년의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면서 오사카 성의 건물들은 도쿠가와 측의 화포 공격 등으로 모두 소실되었고 성의 바깥 해자는 완전히 매립되었다. 자세한 것은 오사카 전투 참고.
원래는 이랬을 거라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건축한 오사카 성을 모델로 재현.
도요토미 시대와 도쿠가와 시대 천수각의 비교.
일본 전역에 토목 공사가 성했던 에도 시대 초기, 에도 막부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명으로 오사카성은 1620년부터 1629년에 걸쳐 재건되었다. 이른바 천하보청[2]의 일환. 비용은 다이묘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마련했다. 도요토미 가문의 성벽과 해자를 파괴하고 그 위에 새로운 석벽을 쌓아 옛 흔적은 사라졌다. 니노마루와 산노마루의 해자를 매립하면서 성의 전체 규모는 4분의 1 정도로 축소되었지만 원래 높이 약 40미터이던 천수각은 새로운 위치에 58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완성했다. 지금의 55미터 높이 천수각보다 더 큰 규모. 혼마루의 지반도 한층 돋워 더욱 웅장해 보이도록 했다. 이 정도의 대역사를 벌인 것은 오사카가 라이벌인 도요토미 가문의 중심지이기는 했지만 이미 서일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거대한 도시로 성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도쿠가와 막부가 오사카 일대를 직할지로 만든 것을 보면 이러한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런데 에도 막부가 오사카 성을 허물고 성을 새로 재건했다는 사실은 에도 막부 중기에 들어서면 잊혀지고, 쇼와 시대까지 사람들은 이 성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1959년의 학술 조사 과정에서 에도막부가 다시 건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오사카 관서 지방 사람들이 충격을 받을 것을 염려해서 그 발표를 주저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쇼군은 에도에 머물렀으므로 정치 무대에서 오사카가 부각되는 일은 없었다. 19세기에 막부 대신 천황을 받드는 존왕양이파가 서일본을 중심으로 세력을 얻으면서 다시금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조슈 정벌 도중 이곳에 머무르다가 사망했으며, 대정봉환 이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오사카 성에 잠시 들어온 적도 있다.그러나 반대파를 피해 배를 타고 에도로 도망쳤다.
재건 후에도 여러 번 화재를 겪어 수리를 해야 했으며, 결국 1665년에 낙뢰로 인해 천수가 소실되었다. 그 뒤로는 오랫동안 성이 재건되지 못하다가 근대에 와서 성터에 일본육군 오사카 조병창과 제4 사단의 건물들이 들어섰으며, 1931년[4]에야 철근 콘크리트로 재건되었다. 1~4층은 에도 막부 시절의 양식을 따라 벽에 회칠을 했지만 5층은 도요토미 시절의 양식을 따라 검은색과 금색을 둘렀다. 꼭대기 층만 뭔가 다른 것은 이 때문.
1945년 3월 9일에 일어난 도쿄 대공습이 일어난 지 4일 뒤에 오사카에 미 공군이 네이팜탄을 쏟아부어 이 성도 오사카와 함께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즉 현재 오사카 성은 종전 이후에 다시 지어진 거다.
지금의 오사카 성은 겉으로는 그럴 듯 하지만 실체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엘리베이터까지 들어가 있다. 외관은 화려하지만 실은 4층까지는 도쿠가와 시대 ,5층은 도요토미 시대의 천수각으로 혼합하여 복원해 고증오류가 심하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외관만 성이고 내부는 현대라고 말한다. 내부의 전시공간은 유물 내용도 다소 부실하고 사진촬영도 금지되어 있어 차라리 주변에 있는 오사카역사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천수각 자체는 오사카시에서 운영하는 박물관이며 전시는 부실하지만 거기서 파는 전시도록은 꽤나 훌륭한 편이다.
천수각 주변에는 옛 오사카 시립 박물관 건물이 있는데, 원래는 오사카 성에 자리잡았던 제4사단 본부 건물로, 현재는 기념품 가게와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다.[5] 오사카 성은 천수각은 제외하고 바깥만 구경하며 군것질만 하고 거니는 것도 괜찮다. 유물 설명은 거의 대부분이 영어가 병기되어 있고, 한글 설명이 있는 유물도 있다. 그러나 일부 한국인 정서에 거슬릴 만한 유물이나[6] 도록은 영문판은 있는데 한국어판이 없다(...). 오사카 전투에 관한 전시물도 꽤 있는데, 특히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부대가 사나다 유키무라의 부대를 향해 돌격하는 장면을 묘사한 병풍과 그것을 재현한 미니어쳐 작품이 유명하다.
그 외에도 구로다 나가마사가 그리게 했다는 오사카 전투 여름의 진 그림을 설명하는 스크린도 있는데, 한국인에게 생소한 일본 전국시대 말기오사카 성 전투에 참전한 무장들의 그림을 하나 하나 확대해가면서 설명해주는 데다가 일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설명이 잘 되어있으므로 보는 맛이 있다. 이 그림에 대한 설명만 제대로 봐도 600엔이 아깝지 않다. 하지만 박물관의 특성상 설명이 느리게 지나가기 때문에 지루해서 지나가는 관람객도 많다(...)
그냥 공원은 무료 입장이지만 천수각에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한다. 입장료가 성인 600엔. 중학생 이하 무료(신분증 제시해야함). 천수각 3~4층 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불가능하다. [7]
일본 성의 진면목을 보고 싶다면 차라리 JR그룹 신쾌속으로 40분쯤 걸리는 히메지 성이나 조금 마이너하지만 더욱 잘 보존되어 있는 히코네 성으로 가자. 가까운 교토에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니조 성이 있지만 니조 성의 천수각은 소실된 상태이므로 천수각의 화려함을 감상할 수는 없다.[8]
한편 오사카 성 주변의 해자를 감상하고 싶다면 타니마치4쵸메역 보다는 오사카 비즈니스파크역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지나다니는 사람수가 매우 적기 때문에 사진 촬영 시 방해받을 일도 없고, 멀리서부터 천수각을 사진을 담을 수 있다. 오사카 성 내 해자에서 배를 타고 관람할 수 있는 오사카 성 고자부네도 오사카 비즈니스파크역 쪽이 훨씬 가깝다. 오테몬 방향보다 지하철역이 더 가깝기도 하고.
매해 8월 말에는 오사카성 등불축제(城灯りの景, しろあかりのえ)가 열리는데 오사카성을 은은하게 비추는 서치라이트와 소원을 비는 등불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볼거리를 자아낸다. 또한 2010년부터 오사카 맛집 경연대회를 같이 실시한다. 맛의 고장으로 유명한 오사카의 유명한 맛집들이 모두 모여 경연대회를 하기 때문에 꼭 참석해야 할 축제중의 하나.
시티즈: 스카이라인라는 도시건설 게임으로 오사카 성과 공원을 그대로 재현한 용자가 있다! 도심 사이로 지나는 케이한 본선까지 재현되었다. 오사카성 공원과 그 뒤로 보이는 우메다 도심의 야경이 압권. 우메다가 뭔가 모르게 로스엔젤레스스럽지만 무시하자
용과 같이 2편에서는 12장 막판 스테이지로 나온다. 그런데 성이 반으로 갈라진다거나 내부에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 등의 무리수적인 요소로 인해 욕을 먹었다. 이 파트는 2편을 리메이크한 용과 같이 극 2에서도 변함없이 나왔다.
오사카 성 공원 내에는 1만 6천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상당히 큰 규모를 자랑하는 오사카성 홀이 있어서 주요 콘서트가 자주 열린다. 돔구장처럼 생긴 외관 때문에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오사카돔으로 착각하기도 하는 홀이다. 오사카성 홀에서 가까운 역은 시영 지하철 나가호리츠루미료쿠치선의 오사카 비즈니스파크역.
[1] 일본 무도관에서 공연한다는 건 일본 음악시장, 일본의 음악계에서 메이저 진입을 의미한다.
[1] 일본 역사서나 소설에서 자주 보이는 일향종(一向宗)의 원래 호칭이다.[2]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압박하기 위해 성을 쌓고 도시를 정비하도록 명한 것이 시초이다. 도쿠가와 막부의 오사카 성 천수각은 이러한 건축 붐의 절정.[3] 당시의 건축법상 방화, 내진 등을 이유로 목조건축이 제한되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천수각 부분은 현대건축에 속한다(...).[4] 쇼와 금융 공황에다 1930년 만철 적자 누적으로 일본의 불황이 심각하던 해. 토목 건설로 경기를 살리려는 시도였을지도[5] 건물은 1931년 천수가 재건과 함께 성내의 사단 본부대 소속 건물들을 집약하면서 건축되어, 1948년부터 1958년까지는 오사카부 경찰청사로 이용되었으며 1960년 이후 박물관으로 변경되었다. 2001년 이후 오사카 역사 박물관 개관과 함께 폐관되었다.[6] 예를 들면 울산성 전투에서 노획해왔다는 조선 두정갑과 승자총통,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유재란 지시 명령서 등...[7] 스룻토 간사이 패스를 제시하면 500엔이다. 2014년 이후 아베노믹스로 인해 100엔당 1050원도 안 되는 상황이 지속되어 많이 저렴해진 편으로 특히 오사카 주유패스를 사용 시 무료로 입장가능하다[8] 대신 니조성은 니노마루 궁전의 화려한 외관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성 내 궁전의 실내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 또한 정원이 아름다우므로, 정원덕후라면 니조성을 꼭 가도록 하자. 오사카 성의 니시노마루 정원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한다.애초에 니시노마루 정원은 벚꽃철이 아니면 그냥 잔디밭&사진포인트[9] 1부는 '나니와 검사' 사건이고, 2부는 '타이코 성'이다.
1. 나고야 성 동쪽에 있는 곡창지대를 점령하라(가토는 살아야 한다). 2. 나고야 성 서쪽과 남쪽에 있는 군량창고(시장)을 파괴하라(가토는 살아야 한다).
브리핑에서 송응창이라는 명군 장수가 처음으로 언급되는데, 아사코에 의하면 요동을 통치하는 자라고 한다. 송응창은 사신으로 온 가토가 가져온 도쿠가와의 서신을 보고 왜에는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못생긴 원숭이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장군도 있다며 바로 본국으로 돌려 보내는데, 가토는 밀려오는 분노도 참으며 일을 완수했다고 한다. 이어 도쿠가와는 나고야와 오사카를 동시에 치는 양동작전을 짜는데, 자신은 아사코와 함께 이시다의 본성인 오사카를 공격하고, 점령이 아닌 군량 약탈을 위해 가토에게 창고가 있는 나고야에 공격 명령을 내린다.
본진은 자원이 조금 부족한 편. 잘만 한다면야 본진 자원만으로 클리어가 가능하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적 세력은 중앙, 3시, 9시가 있으며, 중앙은 절대 건드리지 말자. 망루로 도배가 되어있어서 통과가 거의 불가능하다. 9시, 3시에서 공격을 들어오지만,[7] 3시의 적은 병력 구성도 방어도 약하기 때문에 3시를 한 부대 가량의 병력을 모아 없앤다. 가면서 중앙의 적에게 어그로가 끌리지 않도록 조심하자. 적절하게 3시를 밀 때 창고는 깨지말고 닌자로 점령하면 더 좋다. 그 후 3시에서 자원도 좀 캐며 가지고 있는 병력으로 6시를 친다. 6시의 적은 매우 약하므로 3시를 없애고 병력이 거의 없는게 아니라면 여세를 몰아 바로 쳐들어가도 무방하다. 9시에는 적 망루가 많아 좀 강력하다. 하지만 충실히 1부대 반에서 2부대 정도의 병력을 모아서 치면 밀 수 있다. 설령 실패해도 적은 망루를 추가하지 않으므로 계속 공격하다보면 이긴다. 상점에서 용기린갑옷처럼 휘하 병력에 버프를 많이 주는 아이템이 나오면 사두는 게 좋다. 이외에도 아이템은 잘 사두면 해될 것이 없다.
적의 창고를 완전히 털어본 가토는 창고가 텅텅 비었다는 것을 깨닫고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고니시의 계략. 본 게임에서는 고니시를 지장 타입 캐릭터로 밀어준다. 반면 미츠나리는 취급이 영 좋지 않은 편.
여담으로, 이 미션이 일본 미션들 중에서 도쿠가와군으로 플레이하게 되는 마지막 미션이다. 7장 이후부터 일본 미션들은 줄창 미츠나리군으로만 플레이하게 된다. 그나마 장점이라면, 병력 생산 및 공격하는 것은 이시다 군부터가 유리해짐과 동시에 장수도 이 쪽이 더 쓸 게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