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임무에서부터 자체적인 등갑총병 생산이 가능해진다. 등갑총병의 생산에는 등갑옷 재고가 필요하므로, 이들을 생산코자 한다면 자원 가치 향상 연구를 빠르게 해야만 한다.
임무 전반적으로는 6시 지역 일본의 공격기, 가미가제 테러만 조심하면 된다. 미션 목표 지시 메시지가 시키는 대로 지도 중앙에 본영과 소환소를 지으면 엄청난 수의 뇌격비조가 자동으로 소환되어 투입된다. 첫 투입 당시에는 동맹 소속이었다가 12시를 다 섬멸한 후에야 비로소 아군 유닛으로 합류된다. 뇌격비조 자체는 그렇게 썩 좋은 유닛은 아니지만, 어쨌든 해당 임무에서는 한 번에 많은 수가 투입되며, 썩어도 준치라고 값비싼 최종 테크 유닛이다. 여기에 반드시 천궁이나 영웅 등으로 이들을 보조해야 한다. 뇌격비조가 등장하자마자 6시 진영에서 공격기를 끊임없이 투입시키기 때문. 만약 뇌격비조를 안전하게 지키려면 본진에서 주작을 3개 뽑은 뒤 망루는 기지나 지키라두고 천궁을 포함한 농부와 영웅, 기타 병력을 전부 6시에 내려버리고 허약한 6시를 갈아마시면 된다. 뇌격비조가 나오기 전까지는 6시는 카미카제 외엔 뽑는게 거의 없기 때문. 9시 기지가 털리는게 귀찮으면 6시에 농부를 데려와서 새로 기지를 지어도 좋다. 6시에 기지를 지었다면 3시의 연두색 말고는 공격 하는 적들이 없다. 뇌격비조는 공대공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기적인 지대공 기능을 갖춘 천궁으로 이들을 보조하는 것이 특히 좋다. 천궁의 느린 이동 속도는 주작 등으로 보조할 수 있으나, 시시각각 변화하는 풍향이라는 변수도 있긴 하다. 이제 뇌격비조와 천궁을 주축으로 한 병력으로 적 기지를 다 쓸어버리면 끝난다. 추가적인 뇌격비조의 생산은 불가능하다.
조선이 자신들의 행적을 의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또 다시 도쿠가와의 영지를 친다. 시작 후 9시의 적을 밀어버리면 3시에서 수많은 등갑총병들이 자동으로 소환되어 작전에 투입되는 임무인데, 9시는 아사코를 생산하지만 방비 상태가 꽤 허술하므로 망루로 적의 병력을 막아낸 뒤 조금만 병력을 모아도 쉽게 전멸시킬 수 있다. 틈틈이 주작도 뽑아두자. 9시의 적을 모두 없애면 4시 부근에서 엄청난 수의 등갑총병들이 나타나 작전에 투입되어 특유의 수영 기능을 통해 물을 건너서 3시 쪽의 적을 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등갑총병은 물을 건너는 것은 가능하나, 물 위에선 공격이 불가능하다. 설상가상으로 망루가 지상에 깔려있어서 등갑총병들이 은근히 잘 죽어나간다. 그리고 추가적인 등갑총병의 생산은 설령 재고가 있다고 해도 불가능하다.
등갑총병이 등장할 때, 본진에서 미리 모은 주작에 병력을 태워서 이들과 합류시키고, 12시까지 쭉 이어져 있는 적을 섬멸시키자.
마지막으로 이여송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게임에선 조선을 도와줬던 명나라가 배신(?)하는 국가로 등장하고 이여송 또한 나쁘게 나오지만 실제로 이여송의 조상은 조선인이였다는 사실..
"이성량(李成梁)의 아들로 천하의 명장입니다. 영하(靈夏)를 정벌할 때에 그의 아버지 성량의 권한이 너무 중하여지자 성량을 불러서 북경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그가 성공하게 되자 영하후(靈夏侯)로 봉해져서 지위가 아버지 위에 있게 되고 천하대총병(天下大總兵)이 되어 13총병이 모두 이여송의 명을 받고 있습니다."
《선조실록》 33권 중
고려계 귀화인 출신의 명나라 장수. 고려 전객부령 이천년의 7대손으로 이천년은 고려의 원종 ~ 충혜왕 때의 문신이었던 이조년의 친형이다. 즉, 조상을 거슬러 가면 고려의 문벌귀족까지 닿는다. 더욱 놀라운 건, 조상 이천년의 동생 이조년은 고려 말의 권신인 이인임의 할아버지다. 즉, 본관은 이인임과 같은 성주 이씨가 된다. 이여송의 6대조 이승경은 원나라에서 요양성 참정 등의 벼슬을 지냈고 고려에서는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냈다. 5대조인 이영(李英)은 평안도 초산 사람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정착하여 후손이 이성량 ~ 이여송으로 이어진다.[1] 아버지인 이성량도 명나라 장수로 그냥 일반 장수가 아니라 요동 총병으로서 엄청난 전공을 세워서 요동의 왕으로까지 불리웠다.[2][3] 이성량에게는 이여송 뿐만이 아니라 임진왜란과 사르후 전투에 참가한 이여백(李如柏) 등 9명의 자식이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들 일가를 이가구호장(李家九虎將, 이씨네 용맹한 아홉 장군)이라 불렀다 한다.
조상이 조선 출신이니 조선에 호의적이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런 거 없었다. 이여송은 철저한 중국인으로서 조선을 가벼이 여겼다. 실제로도 행적을 보면 독으로 독을 제압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여송과 그의 군사들도 일본군 못지 않게 조선 백성을 괴롭히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시 명나라는 군량 대신 은을 군대에게 지급하고 군은 그 은으로 상인들에게 군량을 구입하여 조달하는 방식으로 군대를 운용하고 있었고 이여송 역시 이에 따라 만력제로 부터 20만냥의 은을 하사 받아서 조선으로의 장도에 나섰는데, 문제는 명나라 상인들은 압록강 너머서 까지 들어오질 않았고, 당연히 본토에서 전쟁이 터진대다 조선에는 그런 군량을 공급할 상인이 전무했던 것. 개성 수복전에서는 굶어죽는 병사들이 명군에서도 속출했는데, 여기에 이여송의 군량 지원 요청을 무시하고 파업 놀이나 하던 만력제의 막장 행각도 한 몫한다.도와주려면 제대로 돕던가
여러모로 기울어 가던 명나라에서 제독 직급으로 복무하였으며 요동 지역에서 벌어진 여러 난을 평정하여 명성을 얻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직전 영하(寧夏)에서 벌어진 몽골인 보바이(哱拜)의 난[4]을 진압할 당시, 반란군의 우주방어로 명군이 6개월간 진압하지 못했던 성을 수공을 이용해 3개월만에 제압하는 등 당시 명군에서 촉망받는 유능한 장수였다.[5]
임진왜란 파병
보바이의 난을 진압한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에서 전쟁이 벌어졌다는 급보가 압록강을 건너왔다. 명의 만력제는 명군을 파견하여 조선을 돕는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왜군의 정확한 규모와 전력을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우선 조승훈을 보내 3천 병력을 이끌고 왜군을 공격하게 했지만 평양성에서 왜군의 매복 기습에 보기 좋게 깨지고 돌아왔고, 왜군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것을 깨달은 명은 이여송이 이끄는 4만 2천 병력을 파병하기로 한다. 요동 경략 송응창과 함께 이여송은 조선을 돕기 위해 출발했다.
압록강을 건너온 그를 선조는 버선발로 마중했고, 조선 조정은 가뭄에 단비가 내린듯 상기되었다. 명의 대병력이 단숨에 왜군을 쓸어버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 하지만 그는 겨울 내내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않고 전세를 관망하며 미적댔고,[6] 이에 빡친 조선의 대신들이 당장 공격할 것을 종용한 끝에 1593년이 되어서야 병력을 이끌고 남하한다.
평양성 탈환
적장은 보아라! 우리가 한 번 거사하면 너희를 모두 섬멸키에 충분하나, 차마 인명을 모두 해할 수 없어 살 길을 열어주고자 하니, 너는 여러 제장을 거느리고 속히 원문으로 나와 나의 분부를 받들라!
연광정 토굴로 피신하여 저항하는 고니시에게 이여송이 유시한 말
남하한 명군은 만여 명의 조선군 지원과 함께 도합 5만 병력으로 평양성을 포위하였으며, 평양성에 죽치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병력들과 격돌했다. 초기의 섣부른 공격으로 공세 초기에 상당한 피해를 입는 등 잠시 삐걱거리긴 했지만, 이여송은 병력과 화력의 우세를 적절하게 활용하여 성을 함락할수 있다고 판단, 신중한 작전을 계획했다.
이여송은 명군이 보유했던 모든 화포를 평양성에 쏟아 부음과 동시에 병력을 전개시켰고, 일본군은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양측 모두에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병력이 많았던 조명 연합군은 우세를 점할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이여송의 직속 부대인 요동 기병(한족, 몽골인, 여진족 혼성 부대로 질이 낮았다. 주축은 여진 및 몽골 기병)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절강 등지에서 파견된 남병, 즉 척계광 등의 대 왜구 훈련을 받은 보병들이 대활약했다. 척계광의 병법은 3수병 체계로 조총을 쏘는 사수, 활을 쏘는 궁수 그리고 이들을 근접 엄호하는 창을 다루는 장창수가 있었으며, 조선군이 일본의 장창에 대응하지 못해 전부 찔려서 죽을 때 압도적인 위용으로 일본 장창수 및 철포대를 제압했다. 일본은 조총만 있었지, 대포는 없었으며 명군이 포르투갈에서 가져온 홍이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조총을 쏠려고 폼을 잡는 순간 홍이포가 쏟아지니(...)
평양성의 일부 성채는 함락했으나 고니시 군은 남은 성채에 모여 방어를 강화하자 협상으로 포위망을 풀어주고 일본군은 철수해서 평양성을 수복했다.
이여송은 평양 탈환전에서 일본군 1만 8천명 중 1만 2천명을 격멸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정확한 수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이 평양성과 임진왜란 전체의 명군 전과에는 자기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조선의 민간인들을 학살한 것도 섞여 있었다.[7] 이러한 일 때문에 평양 쪽에서는 대 중국 감정이 무지 안좋아졌다. 평양 외에도 안 좋기는 마찬가지여서, 야사에서 이여송이 대차게 까이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8]
평양성이 탈환되자 선조와 조선 조정은 다시 남하하기 시작했고, 조명 연합군은 일본군을 계속 추격하며 2주 후에는 개성을 탈환했다.
그렇게 일본군을 섬멸하고 신나게 추격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너무 서두른 나머지 우키다 히데이에,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병력을 포함한 왜군 상당수가 재집결하고 있다는걸 간과하게 된다. 왜군을 추격하던 명군 기보병 9000명은 벽제관에서 일본군의 반격에 직면했고, 평양성에서 위력을 발휘했던 화포가 없었던 명군은 일본군과 뒤엉킨 개싸움을 시작한다. 이 와중에 위기에 빠진 이여송을 부관 이유성이 목숨을 바쳐 구해내기도 했다.
정오가 되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양측에 큰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본군은 명군에게 개활지에서 조총 사격을 퍼부었으며, 명군은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다가오는 명군 본대와 전투를 벌일 준비가 되지 않은 일본군은 해가 진 후 한성으로 물러났고, 2500여명의 피해를 입은 명군 역시 진격을 포기하고 개성으로 물러나야 했다. 여기서 이여송은 자신의 직속 부대인 요동 기병 다수를 잃고 무력감에 빠진다.[9]
이후 이여송은 이 쯤에서 더이상의 피해를 막고 적당히 일본과 타협하여 전쟁을 마무리하고자 했고, 조명 연합군 전체에 더 이상의 왜군을 추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눌러앉은 명군은 조선에서 식량을 현지 조달(이라 쓰고 약탈이라 읽는다)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조선의 민간에게 크나큰 부담과 고통을 주게 된다. 결국 그는 이후의 명군 민폐 전설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비난을 두고두고 듣게 된다. 오죽하면 류성룡은 임진왜란을 상세한 기록한 책자 징비록에서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얼레빗보다 더 촘촘한 참빗이라고 호되게 씹었다.
죽음
그렇게 이여송은 별다른 전투 없이 조선에서 허송하다가 유정(劉綎)에게 조선 주둔 명군의 지휘권을 인계한 후, 1597년 요동 총병관이 되어 북쪽으로부터 침공해온 토만[10][11]이 이끄는 차하르 부를 제압하기 위해 내몽골 국경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1598년 약간의 병력을 이끌고 숲 주변을 정찰하던 중 수천의 차하르 부 병력에게 포위되었고, 탈출에 실패하여 붙잡힌 뒤 살해되었다. 이때 평양에서 하던 짓(민간인 학살 이후 전공 꾸미기)을 또다시 벌이다 잡혀서 거꾸로 매달려 목이 잘렸다고 한다.
이여송은 조선 파병 당시 본관이 봉화인 금씨(琴氏) 성을 가진 여인과 동거하였다. 이여송이 명나라로 돌아가고 몇달 뒤에 아들이 태어났고 이천근(李天根)이라 한다. 청나라에서 명나라 유민 쇄환 요구가 오자 거제도에 숨어 살았고, 이들의 후손이 현재 거제도 장승포에 살고 있다.
한편 이여송의 손자와 이여매(이여송의 아우)의 손자 역시 훗날 조선에 정착했는데 이들의 후손이 농서 이씨이다.
기타
이여송의 부하인 낙상지는 조선에 제독검이라는 검법을 소개했고, 이 검법은 훗날 조선의 무예신보와 무예보통지에 등재되었다.
접빈사로 나온 이덕형에 대해서 아내와 성이 같다니 이거 순 짐승 아냐? 하는 식의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는 명과 조선의 문화 차이를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조선에서는 성씨도 성씨지만 본적을 따지는 편인데 중국은 집성촌이 발달한데다 성씨는 같아도 본적이 다르다는 개념이 없었다. 즉 이여송이 보인 태도는 가까운 친인척끼리 결혼한거냐는 것. (조선에서도 숙종 시기에 본관이 달라도 같은 성씨면 혼인할 수 없다는 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에 본래 성씨가 다른데 공을 세워서 왕실의 성씨를 하사받았다는 식으로 이항복이 이야기를 꾸몄고, 이 말을 들은 이여송이 오히려 이덕형을 존중하게 했다는 식의 일화도 있다. 국성을 하사받는다는 건 대단한 충신이란 뜻이기 때문.
이익의 성호사설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여송이 선조에게 아주 귀한 음식이라며 '계두'라는 계수나무에 사는 벌레를 선물했고[12] 당연히 선조는 입에 대지도 못했다. 이후 선조는 명 장수들에게 문어 요리를 보냈는데 문어를 안먹는 북방 내륙[13] 출신 장수들이 난처해하며 감히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 우화인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소설 임진록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에선 문어 요리가 아니라 산낙지로 나온다.
그외에 아우인 이여백도 장수였으나 형인 이여송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았다. 안습. 되려 조선 시대 소설에서 이여백이 조선에 와서 죽어 원혼이 떠돌아다니는 설정(사실은 그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안 죽고 명에 가서 죽었기에 이건 허구다)으로 나왔을 정도.
야사
전국 각지에서 이여송과 관련된 야사와 전설이 전래되고 있다. 설화 속 이여송은 대체로 콧대 높고 오만해 소국인 조선을 깔보고 우습게 여기는 부정적인 이미지이다. 그러다가 조선의 숨은 이인, 기인들에게 크게 혼쭐 나 자신의 과오를 반성한다 라는 얘기가 많다.
첫째로는 쇠말뚝 전설이다. 이여송은 풍수에 능했는데, 조선의 지세를 보고 작은 나라에 명당이 쓸데없이 많으며, 훌륭한 인재가 태어나 명을 위협하는 것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말뚝을 수시로 박았다는 전설. 전국 방방곡곡에서 우리 동네 뒷산에 이여송이 말뚝을 박고 튀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이것과 관련되서 가장 유명한 야사는 다음과 같다. 어느날, 백두산 일대에서 명장이 태어나는 명당을 보고 못을 박았고, 전후 고향에 돌아가 아버지 이성량에게 이 일을 자랑스레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 이성량이 그곳은 조선에 살던 옛 조상이 묻혔던 곳이며 네가 그 맥을 끊었으니 우리 집안은 이제 망했다며 통곡을 하는 것이다.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어 결국 이여송은 전장에서 비참하게 죽었고, 그의 형제들 역시 제 명에 살지 못했다는 것이다.
두번째로는 미륵불이 중국을 안 좋게 본다고 그 머리를 자르는 문화재 파괴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고 왜놈이나 똑같은 자라고 엄청 안 좋게 전해진다.
이여송 쇠말뚝 전설은 물론 민중이 오해를 한 것에 불과하다. 숙영지 등을 만들기 위해 쇠말뚝을 박은 후, 이를 남겨둔 채 떠나간 것을 보고서 "지맥을 끊으려 했다"고 가뜩이나 미운 명군과 이여송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운 것 사실 뽑을 때 동원된 예비군들이 투덜댄거라카더라. 그 이후에도 한국인들은 일제나 미군 등이 와서 쇠말뚝을 박을 때마다 똑같은 오해를 하고 비슷한 야사를 만들었다. 이 이여송 쇠말뚝은 이런 전설에 있어서 일종의 프로토 타입인 셈이고, 한국인이 쇠말뚝을 실생활에 쓰지 않았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쇠말뚝이 풍수가 어쩌구 정기를 어쩌구 하는 얘기를 신봉하는, 16세기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남아 있다(...).
매체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임진록 2에서는 명 진영의 영웅 중 한명으로 등장하며, 기병이 없는 명나라에서 유일하게 말을 타고 다녀 기동성이 우월하다. 거기다 강력한 기본 능력치와 연옥술 스킬로 명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영웅이다. 일본이나 조선 입장에서는 이여송 개객기 소리가 절로 나온다. 참고로 임진록 2 초기에는 연옥술이 없는 대신, 생산 건물이 군사 연구소가 아니라 병부성이라 더 초반부터 나왔다.
징비록에서는 정흥채가 연기했으며, 역사대로 거만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벽제관 전투 이후 류성룡이 이여송에게 제발 진격을 하라고 간곡하게 요청하는데 그 노력이 눈물날 지경. 실제로 군량 문제 때문에 이여송이 류성룡을 꾸짖자 그만 류성룡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이여송도 이 꼴을 보고 민망하긴 했는지 부하 장수들에게 '너희들은 전에 나와 함께 서하 지역을 정벌할 때는 여러날 굶고도 참고 공을 세웠다. 그런데 조선에 와서 며칠 군량이 없다고 벌써 돌아가자고 하냐?'라고 갈궜다.
출처: 나무 위키
영상에 나오는 브금들은 임진록2에 나오는 브금이 아닌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3 OST에 나오는 전투할때 나오는 음악을 임의로 깔은 것입니다.
1. 농부를 보호하라(김시민은 살아야 한다). 2. 적 진영을 섬멸하라(이순신, 김덕령, 김시민은 살아야 한다).
처음 시작할 때 명이 이상하게 참전하지 않는다 해서 조선 혼자 공격을 가기로 하는 미션. 명의 낌새가 묘하다는 떡밥을 뿌린다. 그런데 이 미션 이후에 21장에서... 시작하면 봉화대에서 신기전 망루 업그레이드를 하자. 사실은 하지 않아도 무방하나, 그래도 신기전 망루 한두 개 정도 지어주면 더 편하게 깰 수 있다.
동맹군 농부가 시작하자마자 천천히 걸어가는데 그냥 농부가 가는 길을 한참 앞서가서 병력으로 다 쓸어버리자. 다행히 적이 뒤에서 나타나 농부를 습격하는 일은 없다. 농부들을 안전하게 보호한답시고 그들과 자신의 병력들을 부비적거리면서 진행하게 되면 간혹 농부가 접어드는 길쪽의 왼편에 있는, 반대편이 막다른 언덕길로 들어가 끄트머리에서 끼어버림으로써 더 이상 임무 자체를 진행할 수 없게 될 수도 있으므로 절대 바짝 붙으면서 진행하면 안 된다. 이 경우에는 눈물을 머금고 메뉴에서 다시하기를 눌러야 한다.
농부들은 맵 중앙쯤에 도착하면 본영과 방앗간 등의 건물을 짓는데 이것들이 다 완성되면 비로소 우리 건물이 된다. 그 후 방어만 하며 기다리면 이순신이 많은 원군을 이끌고 도착한다. 이때 유성룡은 히로시마에서 뒷정리를 하고 있어서 합류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적이 너무 약하므로 이순신이 데려온 병력과 뽑아놓은 병력으로 9시를 무난하게 밀고 12시로 향하면 된다. 원군에 화차가 있지만, 이 미션에서는 별도로 화차를 더 추가 생산할 수는 없다. 12시 진영의 적이 공격기로 종종 찔러대서 조금 귀찮은 것 빼곤 딱히 어려울 게 없다. 창고를 본영 위쪽에 지을 경우, 신기전 망루를 지어도 적 공격기가 아슬아슬하게 잘 안닿는 범위에서 나무하는 농부를 공격하기도 하므로 창고는 너무 위에 짓지 말도록 한다.
허준 등용 연구가 미리 완료되어 있기 때문에 농부가 본영과 방앗간을 모두 건설한 후에 바로 훈련하여 투입이 가능하다. 스토리상에는 전혀 개입하는 부분이 없다. 아군 유닛의 치료를 위해서나 전비 최대량을 늘리기 위해서나 사실상 반드시 뽑는 것이 권장되지만, 어쨌든 뽑건 말건 플레이어의 자유임과 동시에 이벤트나 트리거 따위를 통한 시나리오 상의 자발적인 등장은 아니므로 상단의 표에서는 참전 목록에서 제외한다.
그리고 영상에서 보면 이순신이 레벨8로 나타난데다가 대사가 틀리다.
이 미션만 그런게 아닌 바로 이 글을 쓰는 4월 28일이 이충무공 탄신일이기 때문이다. 그 날 하루만큼은 이순신의 레벨이 8에다가 대사도 틀려진다. 대사는 대략 오늘이 제 생일입니다. 생일 선물은 준비하셨는지요? 이런 말을 한다.
마지막으로 허준에 대해 알아봅시다.
조선 역사에 길이 남을 명의.
한국 한의학 발전의 지대한 공헌자.
조선 중기의 명의의 제자. 자는 청원(淸源)이고 호는 구암(龜巖)이다. 본관은 양천으로 경기도 양천현 파릉리(오늘날의 서울특별시강서구 등촌2동)에서 출생한 걸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서지학계(서지학자 이양재씨 주장)를 중심으로 경기도 대강면(현재 파주시)에서 출생했다는 학설이 등장해 논란 중에 있다. 양천허씨 시조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경상우수사를 지낸 허곤(許琨)이며 아버지는 용천부사를 지낸 허륜(許碖)이다. 어머니는 허론의 소실 영광 김씨다. 이복형으로 허옥(許沃)이 있으며, 바로 아랫동생인 허징(許澂)은 같은 어머니가 낳은 동복형제로, 허준은 허륜의 차남이다. 일단 허준이나 허징은 족보에는 서자로 표기되어 있다. 허징도 형 못지 않게 비범한 인물로 서자이면서도 문과에 급제하고, 선조 시절 영의정을 지낸 노수신의 딸과 결혼까지 한다. 서얼은 과거시험 못본걸로 아는데 허징은 얼자는 아니라서 문과에 응시한거요??
소설 동의보감 등에서는 그가 서자라서 설움받고 가난하게 지내며 경상도의 명의 유의태에게 의학을 배웠다고 나오나 이는 어디까지나 소설상의 이야기일 뿐이다. 애초에 '유의태'라는 사람은 가공인물이고, 그 모델이 될듯한 유이태라는 인물은 한참~(150년뒤 숙종대)후 의 인물이다. 허준이 어디서 어떻게 의학을 배웠는지는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아 알 도리가 없다. 아예 처음부터 서자가 아니고 후대의 족보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주장도 소수 있지만 이를 확실히 입증할 만한 물증은 없다. 따라서 서자였다는게 중론인데 서자라고 유별나게 차별받거나 가난하게 사는 그런 환경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허준의 집안이 서자를 강하게 차별하는 집안이라면, 같은 서자인 허징이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위에 언급한 화려한 대접을 받았을 리가 없다. 즉 집안에서의 좋은 대우+본인들의 재능이 겹쳐서 성공했다는게 정설.
선조대의 관료이자 학자인 미암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의하면 1569년에 유희춘 자신이 허준을 이조판서 홍담에게 내의원에 천거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기록이 있고 1573년에 정3품 내의원정에 올랐다는 것으로 보아 1569년에 내의원에 들어간 것으로 보여진다.
1575년부터 선조를 진료하는 의원이 되었고 1578년에는 내의원 첨정에 올랐으며 1587년에는 어의 양예수와 함께 선조를 치료하여 호피를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1590년에는 광해군의 두창을 치료하여 그 이듬해에 당상관에까지 오르게 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선조의 곁을 떠나지 않고 모셔서 전후 호성공신 3등에 제수되었다. 게다가 임진왜란에는 류성룡,이덕형,이항복,이원익,이산해와 더불어 피난가지 않고 자진해서 조정에 남아 선조를 모셨다. 이씨가 왤케 많아 드라마 등에서 의료기록을 빼내서 늦게 선조에게 도착한 탓에 선조가 삐쳤다는 내용은 창작이라 보면 된다.
1596년에는 광해군의 천연두를 고쳐 종2품의 가의대부에 제수되었다. 이 때부터 선조의 명으로 조선의 실정에 맞는 의서편찬 작업에 착수하였다.[1]그러나 정유재란 발발로 중단했다가 1600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편찬을 할수 있게 되었다. 1606년에는 양평군에 제수되고 정1품 품계인 보국숭록대부까지 오르게 되었지만 중인에게 너무 높은 직책이라는 대간들의 반발로 제수가 잠시 보류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품서용 원칙이 적용되는 잡과 급제자는 정3품 당하관이 승진의 끝이다. 게다가 허준을 제외하면 잡과 출신으로 정1품까지 승진한 사람은 조선시대 500년을 통틀어 역관 출신인 오경석이 유일하다.
게다가 오경석은 개화기 직전의 사람이다. 즉 선조, 광해군(1500년대 말 1600년대 초)때 활약한 허준이 최초가 된다. 어찌 되었든 중인의 몸으로 정1품에 오르는 것이 논의될 정도이면 허준이 엄청 대단한 것이 맞다. 아무리 지체 높은 명문가의 자제라고 해도 정1품에 오르기 위해서는 엄청난 능력과 처세, 심지어 운까지도 겸비되어야 하고, 그조차도 바늘구멍이라는 것을 감안했을 때 중인이 그 자리까지 오르는 것이 얼마나 극악의 난이도일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2] 현대로 비유하자면 9급 공무원 출신이 총리까지 승진하는 수준.
당시에도 백성들 사이에서 허준의 입지전적인 출세 스토리는 굉장한 화제가 되었다고 하며, 이것이 백성들 사이에 계속 회자되면서 허준 설화가 전국 곳곳에서 전해지는 계기가 된다. 이런 허준과 관련한 설화 혹은 전설들이 우리가 아는 소설과 드라마의 소재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1608년에 선조가 사망하면서 어의인 그는 책임을 지고 귀양을 가게 되었다. 원래 왕이 승하하면 책임을 맡았던 어의는 형식적으로 귀양을 갔다가 곧 풀려나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곧바로 풀려나서 광해군의 어의가 되어 왕의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1610년에 "동의보감"의 편찬을 완료했다. "동의보감"은 당시의 조선과 중국의 모든 의서를 참고하고 허준의 연구가 더해져서 완성된 의학백과사전으로 나오자마자 조선, 청나라, 일본에서 엄청난 히트를 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청나라에 사신으로 간 사람들마다 북경의 서점에서 "동의보감"이 팔리고 있다는 기록을 남길 정도다.
이후 각종 의서 편찬에 매진하였는데 이는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나라의 재건을 위한 의학자로서의 노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615년에 77세로 사망하여 생전에 보류되었던 정1품 양평부원군 보국숭록대부에 추증되었다. 허준의 직계 자손들은 현재 북한에 거의 남아 있어서 자세한 파악이 되어 있지 않다.
동의보감과 다른 한 권을 제외하면 전부 전염병 관련 저작이다. 드라마에서는 침술의 달인으로 곧잘 나오지만 실제로는 역병의 예방 및 치료가 주 분야였다. 실제로 실록에서도 허준 본인이 선조에게 직접 소신은 침 놓는 법을 모르옵니다라고 폭탄 발언(?)을 한 기록도 있다.
상이 이르기를 "침을 놓는 것이 어떻겠는가?"하니, 허준(許浚)이 아뢰기를, "증세가 긴급하니 상례에 구애받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 차례 침을 맞으시는 것이 미안한 듯하기는 합니다마는, 침의(針醫)들은 항상 말하기를 ‘반드시 침을 놓아 열기(熱氣)를 해소시킨 다음에야 통증이 감소된다.’고 합니다. 소신(小臣)은 침 놓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마는 그들의 말이 이러하기 때문에 아뢰는 것입니다. 허임[3]도 평소에 말하기를 '경맥(經脈)을 이끌어낸 뒤에 아시혈(阿是穴)에 침을 놓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 말이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하였다. - <선조실록> 선조 37년(1604년) 9월 23일
물론 침의가 따로 있으니 겸양의 의미겠지만 주 전공은 아니었던 것. 그렇다고 해서 허준이 침술에 아주 문외한이란 뜻은 절대로 아니다. 당대에 침술은 의관이라면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하는 기본 기술이었다. 굳이 현대 의학으로 비유하면 실력있는 내과전문의가 외과 수술 실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물론 당시의 침술이 현대의 외과 수술과 같은 것은 아니니 주의.)
허준의 묘는 경기도파주시 진동면에 위치해 있다. 아쉽게도 이곳은 민통선 지역이라서 방문하기는 쉽지 않다. 위치가 위치라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1991년에야 발견되었는데, 발견 당시에는 봉분과 석물이 묘임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방치된 상태였으며 묘비도 두 동강이 났을 정도[4] 로 상당히 훼손된 상태였었다고 한다. 다행히 묘비에 그의 묘임을 알리는 '허준', '양평군', '호성공신'이라는 표기가 남아 있어서 허준의 묘로 판명될 수 있었다.
2009년, 동의보감이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다만 등재 이후 '의서로서는 세계최초' 같은 보도기사가 나왔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타밀 의료기록 모음집과 디오스쿠리드 필사본 등의 의학서적이 이미 1997년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세계기록유산 등재만 해도 광영인데 괜히 사족을 붙였다가 찬물을 끼얹는 케이스. 물론 이것이 동의보감의 역사적 가치를 깎지는 않는다.
다만 명심해야 할 것은 위에 나와 있듯이 동의보감은 선조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편찬되었단 것이며, 허준의 단독저작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공동 작업으로 당대의 여러 명의들이 왕실 서고와 민간에 떠돌던 수많은 의서들을 참고하여 제대로 된 것을 추려내고 자신의 의학관과 경험을 첨가하여 작업한 것이다. 오늘날 허준의 단독저작인냥 취급받는 것은 전란으로 어의들이 모두 흩어지며 중지된 작업을 전쟁 후 허준이 마무리 한 덕이다.
허준이 해부할 시체가 부족해서 제자들을 해부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당연히 사실이 아니니 믿지 말자. 당장 허준은 임진왜란을 겪은 인물이고, 비록 근왕을 해서 직접 전화에 휩쓸리지는 않았다고 하나 역병이나 기아로 인해 시체를 접할 기회는 충분히 많았을 것이다(....). 또한 허준은 내의원 소속의 의관인 만큼 제자를 두었다면 당연히 주변에 소문이 퍼졌을 텐데, 그런 사람의 제자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면 당대에도 상당한 이슈가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당연히 그에 관련된 기록은 없다. 무엇보다 조선 사회는 유교 사회이며, 학파로 당파가 갈릴 정도로 사제관계가 중요시되는 사회에서 허준이 제자를, 그것도 해부 목적으로 살해했다는 것이 기록으로 남을 정도로 사실이었다면 현재 동의보감의 저자는 허준일 수가 없을 것이다.
처음에 건물이 없고 아군의 대규모 주작 드랍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주작들이 날아가는 경로에 셀 수 없이 많은 보라색의 망루가 지어져있기 때문에 결국 대부분이 죽는다[9]. 그러므로 본 미션에서는 최대한 빨리 발전을 해야한다. 적은 틈을 주지 않고 쳐들어오는데, 이번엔 적의 생산 건물이 꽤 많기 때문, 공격할거면 12시의 대장간, 마굿간, 병영을 먼저 쳐야한다. 처음부터 급속히 발전하며 병력을 계속 뽑아줘야한다. 바로바로 효율적이고 빠르게 병력을 뽑아낸다면 망루 없이 막아낼 수 있지만 자신이 없다면 역시 망루를 7~9개 정도 지어주자. 다행히 자원은 풍족하기 때문에 바로 망루 업그레이드가 가능하기도 하고, 병력도 무리 없이 뽑아낼 수 있다/ 병력을 모으면서 공세를 막아낸 후 역습을 가서 한 군데를 끝장내는 식으로 하면 이길 수 있는 미션이다.
중국명나라 말기의 무장. 가흥 지역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발발 후 조선에 파견되어, 일본과의 평화 협상을 위해 고니시 유키나가와 접촉했다. 1593년에는 일본까지 건너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 그의 요구 사항을 들었는데, 조선 4도 할양, 명의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보낼 것 등 그의 요구가 너무나 터무니없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이를 도요토미가 왜왕이 되고 싶어하는 것으로 조작하여 명 황실에 보고한다. 그리고 고니시를 위시한 일본 내 반전파들이 도요토미에게 명이 자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속이기로 입을 맞춘다. 그러니까 고니시와 짜고 희대의 국제 사기를 벌인 것.
명은 이 구라를 믿고 심유경의 외교 능력에 감탄하면서(...) 도요토미를 왕에 책봉한다는 문서를 보냈는데, 거짓 내용을 읽어주기로 한 도요토미의 승려 사이쇼 조타이가 명의 봉공안을 그대로 읽어버리는 바람에 그의 구라는 곧바로 탄로나게 된다. 머리 끝까지 열뻗친 히데요시는 그대로 전쟁을 재개할 것을 명령하고, 그렇게 정유재란이 발발했다.
결국 자신의 구라가 탄로난 뒤 심유경은 일본으로 망명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치다가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잡혀 천자를 능멸한 죄로 참형에 처해진다. 고니시 역시 모가지가 잘리기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사면됐다.
평가
다만 그를 무조건 까기는 어려운 것이 명의 입장에서 보면 최소한의 피해로 조선을 회복시킬 수만 있다면 마다할 건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명의 목적은 자국 군대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협상이 성공하고, 조선의 영토를 보전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화의가 가능성이 있을 때의 이야기였고, 애초에 전쟁 지속 중단 여부의 결정권을 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끝까지 야욕을 버리지 못했기에 화의는 애초부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명이 들어줄 수 있는 것은 언제까지나 왕 책봉에 더해봐야 조공을 받는 정도인데 히데요시는 조선 영토를 병합하려고 했기 때문. 그 증거가 화의 도중에 발생한 제2차 진주성 전투로 드러났는데도 심유경은 사태를 파악할 생각도 없이 끝까지 화의를 밀어붙였다. 이는 심유경이 처음부터 조선에 온 목적이 일본과의 화의였기에 전투로 전란이 매듭지어질 경우 자신의 입지가 난처해질걸 염려해 사실 왜곡을 감행하면서까지 화의를 진행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고니시 유키나가와 서로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져 장기간 양국을 속이는데 성공했지만 애초에 심유경이나 고니시 유키나가나 양국에서 입지가 거의 없던 인물들이라 속이는데 한계가 있어 결과적으로 화의가 파탄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결국 이로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병력을 추스릴 충분한 시간을 벌어놓고 재침을 시도할 수 있었고 명은 또다시 정유재란에 참전했다가 잘 준비된 일본군과 제대로 붙어 엄청난 인명 피해 및 막대한 재정 소모와 병력 손실을 입기에 이르니 심유경의 화의 추진은 명에게 이득을 주기는 커녕 더 많은 손실을 입힌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심유경이 명나라의 신하라는 점을 감안하면 심유경의 행각은 국가 대 국가의 관점에서 볼 경우 명나라가 괜히 조선에게 외교 분쟁을 해결해주겠다고 나섰다가 결과적으로 조선에게 사기를 친 꼴이 된다.
도쿠가와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명 또한 군대를 파견한다. 그러나 나가사키에 상륙한 후 어째서인지 도쿠가와를 돕는 것이 아니라 조선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참전해 도쿠가와의 동군을 공격한다. 심지어 조선군에게 자신들의 출병 사실을 알리기까지 한다. 장수들은 의아해 하지만, 원정함대의 지휘관인 송응창은 천자의 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작전을 감행한다.
최초의 명 미션이다. 도쿠가와와 이야기가 잘 되었다고 알고 있는 플레이어들의 뒤통수를 치며 명은 다짜고짜 도쿠가와를 공격한다. 시작 후 주어진 수상 병력으로 9시 방향 쪽으로 가며 적선들을 없애고, 주작은 미니맵이 가리키는 6시에 내리자.
손을 빨리 움직여야 한다. 자신이 느리게 발전하고 있다고 해서 컴퓨터가 느릿느릿 러쉬를 와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통 미션은 항상 명군이 제일 어렵다. 명군은 초반에 건물들이 들어 차 있지 않은 미션들이 많아서 그렇다. 게다가 임진록 시나리오 인공지능의 특성상, 항상 기지를 만들거나 운영할 때 맨 처음의 러쉬는 무조건 장수가 섞여 들어온다.
그래도 이번 미션은 적의 색깔이 3시 진영 하나이기 때문에 할 만하다. 튼튼하고 강력한 망루를 7~9개 정도 모아서 짓고 병력이 어느 정도 모일 때까지 버티다가, 그 후부터는 무난하게 병력을 모은 후 쳐버리면 된다. 장수가 많으므로 아이템을 잘 사면 더 편하다. 6시에 병력을 내린 후 쓸모 없어진 주작들은 시야나 밝히고 죽으면 된다..
인화(항주, 항저우) 출신으로 1565년 진사에 등용되었으며 여러 고위직을 두루 거치며 관리로써의 수완을 인정받았다. 1592년에 경략 직급으로 사실상 명군의 2인자였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병부우시랑경략비왜군무(兵部右侍郎經略備倭軍務)로 임명되어 조선을 도우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는 1592년 12월 내내 조선에 파견될 명군과 보급 및 물자를 점검하였으며, 이여송이 이끄는 요동군을 주축으로 한 4만 2천명의 명군을 조직하여 조선에 파견한다. 임진왜란 직전 터진 영하 반란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단기간에 대병력을 편성하여 신속하게 전개한 데엔 송응창의 관리 수완이 한 몫 했으며, 결과적으로 조명 연합군이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명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화 협상을 시작하자 이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다 그의 정적이었던 병부상서 석성에게 탄핵되어 사임된다. 이후 죽을 때까지 인화에서 지냈다.
저서로 경략복국요편(經略復國要編)을 편찬하였으며, 이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군의 1차사료로써 임진왜란을 명군의 입장으로 관찰할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조명 연합군이 펼쳤던 여러 작전 및 조선 장수들에게 내리는 지령 등. 읽어보면 당시 송응창이 조선에 파견된 명군의 보급 문제로 얼마나 고민했는지 알수있다. 징비록 드라마에서 보면 왜곡된 인물이다. 남병의 수장답게 북병의 수장 이여송과 같다고 하겠지만 실록과 징비록에서 다르다 개념적이였고 일본의 음모와 조선분할에 대한 명의 논쟁을 조선에 알리고 왜군의 터무니 없는 요구 조건을 일축하였다 그리고 이여송이나 북병장수들 처럼 거만하지 않았다
징비록에서는 최일화씨가 맡았다. 굳이 특이점이 있다면, 심유경과의 국제사기극이 탄로나자 울화통이 터진 나머지 심유경에게 니킥을 먹인단 거다(…). 조인트 까인 심유경의 반응은 덤.
1. 김덕령은 폭뢰격으로 나무를 태워라(유성룡, 김덕령은 살아야 한다). 2. 적의 진영을 섬멸하라(유성룡은 살아야 한다).
고니시의 설득에 조선 조정은 일리가 있다 판단하여 병력을 보충하고 군수물자를 증강해 대대적인 일본 진출을 진행한다. 첫 출전으로 쓰시마를 점령하기로 하는데, 이순신 제독이 바람을 이용한 화공을 제안하고 김덕령이 그 임무를 자청하여 폭마혈도를 받게 된다.
오랜만의 조선 미션이다. 이 미션은 정석대로라면 처음에 미니맵에서 상륙하라는 지점에 내려서, 폭마혈도를 들고 있는 김덕령이 폭뢰격으로 불을 붙여 나무를 태우고 그 안에 들어가서 얼마 없는 적을 격퇴한 후, 수송기가 실어다 준 농부들로 건물을 짓고 발전하여 적을 밀어버리는 것이 정석 플레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필요도 없다. 처음 주어진 거북선 2기와 판옥선 2기가 굉장히 강하다. 시작하자마자 물길을 따라 9시로 직행하여, 해안가의 적을 쓸어버린 후 상륙하자. 그 후 죽지 않아야 하는 유성룡과 김덕령을 알아서 잘 컨트롤하며 9시의 적을 한 방에 밀어버리자. 이 전략이 먹히는 이유는 아군의 병력이 너무 많고, 또 김덕령의 폭뢰격이 장난 아니게 강해서 적의 병력이 모이기도 전에 개박살을 낼 수 있기 때문. 그냥 밀어도 되지만 걱정이 된다면, 처음에 원거리 유닛 한 기로 적을 끌어와서 판옥선과 거북선으로 다 죽인 후 상륙해도 된다. 어쨌든 적이 병력을 모으기 전에 신속히 몰아쳐야 하는게 포인트.
그 후 6시를 밀고, 원래 가기로 해야 했던 곳에 가서 약간 있는 적을 다 죽이면 끝. 아주 짧은 시간에 끝낼 수 있다. 정석대로라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아군은 창병, 의병, 궁병 같은 초반 유닛밖에 소환을 못 하는데에 비해서 9시 진영은 수송선, 공격기, 귀갑차 같은 고급 유닛들을 뽑아내기 때문. 폭뢰격을 마나가 100이 되는대로 적 망루를 1순위로, 건물들 옆에 붙어서 써주자. 일본 건물은 내구도가 특히 부실하여 한 방에 날아가버리거나, 엄청난 타격을 받는다. 이렇게만 하면 쉽게 끝낼 수 있다. 초반에 너무 많은 병력과 영웅을 지급해준 점과 더불어 폭뢰격이 건물에 엄청나게 강하다는 것을 간과한 제작진의 패착이라 볼 수 있다.그나마 김덕령으로 밸런스를 맞췄지 곽재우라면..
게임이 아닌 실제 역사적으로 대마도 정벌에 대해서도 알아봅시다.
대마도 정벌(對馬島征伐)은 13세기에서 16세기까지 한반도와 중국을 침략하여 노략질하던 왜구의 본거지인 쓰시마(대마도)을 정벌한 사건이다.
역사적으로 제1차 대마도 정벌은 1389년(고려 창왕 2년) 박위가 이끌었으며, 제2차 대마도 정벌은 1396년(조선 태조 5년)에 있었다. 가장 유명한 제3차 대마도 정벌은 1419년(세종 1년)에 이종무가 이끈 정벌로, 기해동정(己亥東征)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오에이의 외구(일본어: 応永の外寇)라고도 부르며, 당시 대마도에서는 누카다케 전쟁(糠嶽戰爭)이라고 하였다.
쓰시마는 조선과 일본 양국 사이에 있어 중개를 맡는 특수 사정도 있거니와, 원래 그 토지가 협소척박(狹小瘠薄)하여 식량을 밖에서 구해야 생활을 유지하므로 고려 말부터 조공과 동시에 미곡(米穀)을 받아갔다. 또 조선에서도 쓰시마 섬을 우대하였으며 쓰시마는 통상의 이익을 독점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땅에 기근이 들 때에는 해적으로 나타나 해안을 약탈하므로 병사를 일으켜 정벌하게 되었다.
1418년(태종 18)에 대마도는 큰 흉년이 들었다. 당시 대마도주(對馬島主)인 종정무(宗貞茂, 일본어: 소 사다시게[*]) 또는 종정아(宗貞芽)가 죽고 아들 종정성(宗貞盛, 일본어: 소 사다모리[*])가 뒤를 잇게 되었는데, 흉년이 들어 식량 문제가 심각해지자 크게 들고 일어나 명나라의 해안 지역으로 가던 도중, 조선의 비인(庇仁)·해주(海州) 해안 지역을 약탈하게 되었다. 조선은 이때 승계한 새 도주인 종정성이 왜구를 선동한 것이라고 의심하여 직접 쓰시마 섬을 치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이때 기록을 보면, 명나라로부터 돌아오는 왜구를 중간에서 공격하는 방법과 쓰시마 섬의 본거지를 치는 두 가지 방법을 논의한 것으로 나온다.
1419년(세종 1년) 6월 9일, 상왕이 된 태종은 대마도를 정벌할 것을 중외(中外)에 교유하였다.[1]
당시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된 태종은 아직 군사에 관한 결정을 직접하고 있었다. 태종의 주도 아래 장천군 이종무를 삼군 도체찰사로, 영의정 유정현을 삼도 도통사(三道都統使)로, 의정부 참찬 최윤덕을 삼군 도절제사(三軍都節制使)로 명하고, 우박(禹博), 이숙묘(李叔畝), 황상(黃象)을 중군 절제사, 유습(柳濕)을 좌군 도절제사, 박초(朴礎)와 박실(朴實)을 좌군 절제사로, 이지실(李之實)을 우군 도절제사로, 김을화와 이순몽(李順蒙)을 우군 절제사로 삼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의 3도에 있는 병선 227척과 병사 1만7천 명을 거느리고 음력 4월에 출병하도록 명하였다.
1419년(세종 1) 음력 6월 19일 거제도 남쪽 주원방포를 출발하여 20일에 쓰시마 섬에 도착하였다. 이종무는 도주 종정선에게 항복을 권하였으나 대답이 없자 왜구를 수색하여 1백여 명을 참수하고 2천여 호의 가옥을 불태웠다. 131명의 명나라 포로를 찾아내었다. 29일에는 가옥 70여 호를 태우고 명나라 사람 15명과 조선인 8명을 구출하였다.
이종무 장군은 좌군과 우군에게 두지포에 포진하라 명령하고 자신은 음력 7월 3일에 주력함대(舟師)를 이끌고 거제도로 철수했다. 대마도에 하륙한 지 13일만이다. 정벌군 지휘부를 일단 빼낸 태종은 병조판서 조말생으로 하여금 대마도 도주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내도록 했다.
“
선지(宣旨)하노라. 대마도라는 섬은 경상도의 계림(鷄林)에 예속했으니, 본디 우리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에 실려 있어, 분명히 상고할 수가 있다. 다만 그 땅이 심히 작고, 또 바다 가운데 있어서, 왕래함이 막혀 백성이 살지 않는지라, 이러므로 왜인으로서 그 나라에서 쫓겨나서 갈 곳이 없는 자들이 다 와서, 함께 모여 살아 굴혈을 삼은 것이며, 때로는 도적질로 나서서 평민을 위협하고 노략질하여, 전곡(錢穀)을 약탈하고, 마음대로 고아와 과부, 사람들의 처자를 학살하며, 사람이 사는 집을 불사르니, 흉악무도함이 여러 해가 되었으나 우리 태조대왕(太祖大王)께서는 지극히 어질고 신무(神武)하시므로, 하늘 뜻에 응하여, … 대마도의 작은 추한 놈들을 섬멸하게 하니, 마치 태산이 까마귀 알을 누르는 것과도 같고, 맹분(孟賁)·하육(夏育)같은 용사가 어린아이를 움키는 것과도 같으나, 우리 태조께서는 도리어 문덕을 펴고, 무위(武威)를 거두시고, 은혜와 신의와 사랑과 편안케 하는 도리를 보이시니, 내가 대통을 이어 나라에 임한 이래로 능히 전왕의 뜻을 이어서, 더욱 백성을 측은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비록 조그마한 공손하지 못한 일이 간혹 있어도, 오히려 종정성(宗貞盛)의 아비 종정무(宗貞茂)의 의를 사모하고 정성을 다한 것을 생각해서, 범하여도 교계(較計)하지 않았으며, 통신하는 사신을 접할 때마다 사관(使館)을 정하여 머물게 하고, 예조에 명하여 후하게 위로하고, 또 그 생활의 어려움을 생각하여, 이(利)를 꾀하는 상선(商船)의 교통도 허락하였으며, 경상도의 미곡을 대마도로 운수한 것이 해마다 대개 수만 석이 넘었으니, 그것으로 거의 그 몸을 길러 주림을 면하고 그 양심을 확충하여, 도적질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천지 사이에 삶을 같이할까 하였노라.
나의 용심(用心)함도 또한 부지런히 하였더니, 뜻밖에도 요사이 와서 배은 망덕하고 스스로 화근을 지으며, 망함을 스스로 취하고 있으나, 그 평일에 귀화한 자와 이(利)를 얻으려고 무역하거나 통신 관계로 온 자와, 또 이제 우리의 위풍(威風)에 따라 항복한 자는 아울러 다 죽이지 아니하고, 여러 고을에 나누어 두고서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어서 그 생활을 하게 한 것이며, 또 변방 장수에게 명하여, 병선을 영솔하고 나아가서 그 섬을 포위하고 모두 휩쓸어와 항복하기를 기다렸더니, 지금까지도 그 섬 사람들은 오히려 이럴까 저럴까 하며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내 심히 민망히 여긴다. 섬 가운데 사람들은 수천에 불과하나, 그 생활을 생각하면, 참으로 측은하다. 섬 가운데 땅이 거의 다 돌산이고 비옥한 토지는 없다. 농사하여 곡식과 나무를 가꾸어서 거두는 것으로 공(功)을 시험할 곳이 없으므로, 장차 틈만 있으면, 남몰래 도적질하거나, 남의 재물과 곡식을 훔치려 하는 것이 대개 그 평시에 저지른 죄악이며, 그 죄악이 벌써부터 가득차 있는지라, 어두운 곳에서는 천지와 산천의 신이 묵묵히 앙화를 내리고, 밝은 곳에서는 날랜 말과 큰 배며, 날카로운 병기와 날쌘 군사로써 수륙의 방비가 심히 엄하니, 어디가서 주륙(誅戮)의 환을 만나지 아니할 것인가. 다만 고기 잡고, 미역 따고 하여 매매하는 일은 이에 생활의 자료가 되는 바인데, 이제 와서는 이미 배은하고 의를 버려 스스로 끊는 것이며, 내가 먼저 끊을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 세 가지를 잃은 자는 기아를 면치 못할 것이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니, 이에 대하여 계책하기도 또한 어려운 일이다.
만약 능히 번연(飜然)히 깨닫고 다 휩쓸어 와서 항복하면, 종정성은 좋은 벼슬을 줄 것이며, 두터운 녹도 나누어 줄 것이요, … 이 계책에서 나가지 아니한다면, 차라리 무리를 다 휩쓸어서 이끌고 본국에 돌아가는 것도 그 또한 옳을 일이어늘, 만일 본국에 돌아가지도 아니하고 우리에게 항복도 아니하고, 아직도 도적질할 마음만 품고 섬에 머물러 있으면, 마땅히 병선을 크게 갖추어 군량을 많이 싣고 섬을 에워싸고 쳐서 오랜 시일이 지나게 되면, 반드시 장차 스스로 다 죽고 말 것이며, 또 만일 용사 10여 만명을 뽑아서 방방곡곡으로 들어가 치면, 주머니 속에 든 물건과 같이 오도가도 못하여, 반드시 어린이와 부녀자까지도 하나도 남지 않을 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는 까마귀와 소리개의 밥이 되고, 물에서는 물고기와 자라의 배를 채우게 될 것이 의심 없으니, 아, 어찌 깊이 불쌍히 여길 바 아니겠는가. … 이제 선지(宣旨)로써 일의 마땅함을 자세히 알게 하노니, 잘 생각하라.
”
— 세종대왕실록 4권 1년 7월 17일 (경신)
귀화한 왜인 등현(藤賢)이 항복 권고문을 가지고 대마도로 떠났다. 대마도는 예부터 조선의 땅이었으니 본국으로 돌아가든지 항복하라는 것이다. 위기를 느낀 대마도 도주가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에게 신서(信書)를 보내어 항복하기를 빌고 인신(印信)을 내려 줄 것을 청원했다.
대마도를 다녀온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가 수강궁에 무릎을 꿇고 대마도 도주의 항복을 전했다. 태종은 항복을 가납하고 교유했다.
“
사자(使者)가 서신을 전해 너의 항복의 뜻을 알았노라. 본도인(本島人)을 돌려보내는 것과 인신(印信)을 내려달라는 것이 가상하다. 너희들이 작은 섬에 모여들어 굴혈을 만들고 마구 도적질을 하여 자주 죽음을 당하는 바 이는 하늘이 내려 준 재성(才性)이 달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작은 섬은 대개 다 돌산이므로 토성이 교박(磽薄)해서 농사에 적합하지 않고 바다 가운데 박혀 있어 물고기와 미역의 교역에 힘쓰나 사세가 그것들을 대기에 어렵고 바다 나물과 풀뿌리를 먹고 사니 굶주림을 면하지 못해 양심을 잃어 이 지경에 이르렀을 뿐이니 나는 이것을 심히 불쌍하게 여기노라.
이제 너희들의 소원에 따라 비옥한 땅에 배치해 주고 하나하나에 농사짓는 차비를 차려 주어 농경의 이득을 얻게 하여 굶주림을 면하게 하여 주리라. 마음을 돌려 순종하고 농상(農桑)을 영위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섬의 행정을 관리할 자를 나에게 보내와 내 지휘를 받도록 할지니라.
”
— 세종대왕실록 5권 1년 10월 18일 (기축)
도이단도로(都伊端都老)를 대마도로 돌려보낸 태종은 정벌군의 전면 철수를 명했다. 두지포에 진을 치고 있던 좌군과 우군이 철군했다. 이후 대마도는 조선의 정치질서 속에 편입되어 조선 국왕이 관직을 내려주는 통치권속에 예속되었다.[2]
이 원정은 180명의 조선군이 전사하는 등 많은 인명 희생이 따랐으며 분명한 군사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원정대가 돌아온 후 다음 원정을 논의하였으나 사정상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그러나 원정 이후 대마도주(對馬島主)가 항복을 청하여 옴으로써 사태가 일단락되게 되었다. 대마도주는 또한 신하의 예로서 섬길 것을 맹세하고 경상도의 일부로서 복속하기를 청하였고, 왜구를 스스로 다스릴 것과 조공을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세종이 이를 허락하고 이후 삼포를 개항할 때에 대마도 도주에게 통상의 권한을 줌으로써 평화로운 관계로 전환되었다.
이 정벌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왜구의 침입을 방지하는 효과를 가져왔으며, 통상을 허락하여 일본인들로 하여금 평화적으로 무역과 내왕을 하도록하는 정책을 펼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2009년 3월 19일 한국역사연구회 학술 발표회에서 ‘조선 초기 대마도 정벌의 원인과 목적’을 발표하는 이규철 가톨릭대 강사는 기해동정이 왜구 소탕보다는 명나라의 일본 정벌을 저지하기 위한 외교 전략이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우선 기해동정 이전 10년간 왜구로 인한 피해가 거의 없었다는 점을 꼽는다. 고려말부터 태종 초기까지 기승을 부렸던 왜구의 침입은 태종 9년(1409)부터 크게 감소했다. 10년 만의 왜구 피해에, 그것도 대마도가 조선과의 우호적 관계를 위해 노력하던 상황에서 조선이 대규모 출병을 감행한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출정 명령 4일 만에 65일분의 군량과 1만 7000여명의 병력을 준비한 대목도 이전부터 대마도 정벌을 치밀하게 계획했음을 시사한다.
조선의 피해가 뜸했던 때, 왜구의 주요 활동 무대는 명나라 연안지역이었다. 명나라는 일본 쇼군을 통해 왜구를 제어하는 방식을 취했지만 원도의에 이어 등극한 원의지가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자 일본 정벌을 계획한다. 조선은 명나라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명나라가 일본 정벌에 나서면 명나라의 관계 개선에 노력해온 태종으로선 이에 개입하지 않을 명분이나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조선은 최소한의 희생으로 전쟁을 막기 위해 결국 조선은 명나라의 일본 정벌을 막으려면 명의 왜구 피해를 줄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 대마도 정벌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다. 대마도 원정군이 대규모 부대 편성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으로 전면전을 회피한 것도 정벌의 목적이 왜구의 격멸이 아니라 조선의 위력을 과시하는 상징적인 공격이란 추측을 뒷받침한다. 조선은 정벌을 단행하면서도 일본과 대마도와의 관계를 극단적인 상태로까지 몰고 갈 의도는 없었던 것이다.
이 강사는 조선이 대마도를 정벌해 명나라의 일본 정벌을 사전에 차단하는 한편 대외 목표인 북방지역, 특히 여진으로의 진출과 영향력 확대라는 일거양득을 취했다고 파악한다. 왜구를 제어한 공로로 여진 지역의 실력행사에 대한 명나라의 암묵적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오사카를 무사히 방어한 서군은 이 기세로 곧바로 도쿠가와의 본성인 교토 앞에 있는 기후성으로 진격한다.
9시 보라색이 자주 보내는 카미카제와 처음부터 쳐들어오는 12시 진영의 세이쇼오를 주의할 것. 세이쇼오는 건물과 기갑에 강한 지진을 사용하기 때문에 주의해야한다. 세이쇼오가 아이템을 떨어뜨리면 못 쓰는 건 주워서 내다 팔자. 우선 귀갑차 + 조총병만 모일때까지 버텨주고, 적당히 모였다 싶으면 순회공연을 돌자. 어디부터 공격할지는 플레이어가 선택하자. 그 외에는 수비할 때 망루를 귀갑차로 감싸도 좋다.
여담으로 당시 기후를 다스리던 다이묘는 오다 노부나가의 손자인 오다 히데노부로 서군 소속이었다. 즉, 내전을 벌인 셈이다.
오다 히데노부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자.
오다 히데노부(일본어: 織田秀信, 1580년 ~ 1605년6월 24일)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부터 에도 시대의 무장, 기리시탄 다이묘이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적장손이자 노부나가의 장자인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의 적장자이다. 아명은 산보시(三法師)이며 사부로(三郎)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기후(岐阜)의 성주이자 동시에 조정의 관위가 중납언(中納言)이었던 연유로 기후노 중납언(岐阜中納言)이라는 별칭도 있었다. 일본의 사료인 『공경보임(公卿補任)』에는 다이라노 히데노부(平秀信)로 기록되어 있다. 세례명은 페드로이다.
생애
덴쇼 8년(1580년) 오다 노부타다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덴쇼 10년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 당시 조부 노부나가와 부친 노부타다가 모두 주살되면서 마에다 겐이(前田玄以)의 보호 하에 본래의 거처인 기후 성에서 기요스 성(清洲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같은 해, 기요스 회의에서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의 추대를 받아 노부나가의 또 다른 중신 시바타 가쓰이에(柴田勝家)의 지지를 받던 숙부 노부타카(信孝)를 제치고 3세의 나이에 오다 가문의 당주가 되었다. 직할령은 오미 국(近江国) 사카타 군(坂田郡) 3만 석이었으며 나이가 어려 친정이 불가능하였으므로 호리 히데마사(堀秀政)가 영주 대리를 맡았다. 덴쇼 16년(1588년) 이름을 오다 사부로 히데노부(織田三郞秀信)로 바꾸며 성인식을 치뤘는데, 이 때 이름 중 ‘히데’(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따왔으며, ‘노부’는 조부인 오다 노부나가에서 따왔다.
산보시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오다 가문의 가신들을 압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기세를 몰아 교토의 조정으로부터 관백의 지위를 받아내었으며 관백의 지위를 이용하여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군사행동 및 세력 다툼을 금지하는 내전 금지령을 교토 조정(일왕령) 이름으로 포고함으로써 전국의 다이묘들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권위에 굴복하게 하였다. 그럼으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더이상 오다 가문의 후계자인 산보시의 보호자로서의 역할이 필요없게 됨에 따라 산보시는 자연스럽게 일개 소 지방의 성주 가문(오다가문)의 산보시가 되었으며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일개 소 지방의 세력가로서 서군의 이시다 미쓰나리의 편에 가담하였다가 몰락하게 된 것이다.
한편 오사카에서 나고야가 가토에게 습격당할 것을 예상한 고니시는 군량을 미리 옮겨 놓고 동군이 오사카로 진격해 오고 있다고 미츠나리에게 보고한다.
귀갑차의 등장 미션. 해당 사실을 강조한 이유는, 일본 미션은 조총병을 태운 귀갑차만 모아서 어택땅만 찍으면 웬만한 경우에는 모두 쉽게 이기기 때문이다. 일반 멀티플레이 게임에서는 시장을 짓고 자원 가치 향상 업그레이드까지 해야 귀갑차 생산건물을 지을 수 있으므로 바로 귀갑차를 모으기 힘들 뿐더러, 본 게임은 초반 유닛의 생산속도가 미칠 듯이 빠르므로 패스트 귀갑차는 카운터를 맞을 위험이 큰 도박성 있는 전략이다. 숙련된 플레이어들 중에는 영웅 스킬로 짤짤이를 해대고 도망다니며 병력을 갉아먹는 컨트롤이 가능한 수준의 플레이어들도 존재하기 때문에 해당 전략이 더욱 쉽지 않으며, 여기에 마법력이 굉장히 빨리 회복되는 게임의 특성상 실현하기가 더욱 성가시다. 하지만 컴퓨터 인공지능은 사람처럼 악랄한 견제플레이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귀갑차들을 모아서 공격하기 매우 용이하다. 다만 주의할 점은 마지막 패치를 기준으로, 원거리 유닛들은 미스 판정이 자주 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수가 모이기 전까지는 위력이 다소 모자랄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모으면서 개체 수를 잘 유지해야한다는 점이다. 모든 기반 시설을 처음부터 건설하기 시작해야하는 멀티플레이 게임과는 달리 시나리오의 경우에는 미션을 거듭할수록 처음부터 여러 고테크의 건물들이 미리 지어져 있기 때문에, 귀갑차의 생산이 쉽고 빠르다. 조총병과 와키자카를 태운, 철갑탄 업그레이드를 한 귀갑차의 위력은 기관총에 준할 정도로 절륜하다.
시작하자마자 우측의 망루 4기 중 맨 위에 있는 망루를 제외하고 전부 해체시키고 자원 가치 향상 연구를 한다. 그 후 방어는 주어진 유닛만으로 진행하며 망루 해체를 통해 얻은 3기의 건설수레로 전부 대장간을 짓고 귀갑차만 뽑는다. 3시의 방비 상태가 워낙 허술하기도 하고 곡물이 풍부한 곡창 지대이기 때문에 먼저 섬멸하여 해당 지역을 확보하는 것이 좋다. 다만, 이 3시 지역은 시간이 지나면 노랑색 세력의 도쿠가와, 가토를 포함한 적들이 쳐들어오니 주의해야한다.
총병에 대한 격려 버프 효과가 강력한 와키자카 등의 영웅을 귀갑차 하나에 넣어주거나 같이 동반하여 귀갑차로 순회공연을 다니면 끝난다. 풍백술의 위력이 사기적이지만 굳이 업그레이드를 안 해도 쉽게 깰 수 있다. 그래도 상인이 폭마혈도를 들고 오면 꼭 사주자. 싸울 때 고니시로 들어가서 폭뢰격을 갈기면 건물들이 죄다 박살나서 플레이 타임을 크게 단축시켜줄 것이다. 컨트롤에 자신 있으면 바쁘게 움직이면서 풍백술도 써주면 더 좋지만, 굳이 그런 수고를 할 필요도 없이 쉽게 끝낼 수 있다.
귀갑차의 장점 중 또 하나를 들어보자면 영웅을 귀갑차에 태우고 다닐 수 있어서 피관리를 하기 쉽다는 것도 플레이 타임 단축에 도움이 된다(안정적인 영웅의 격려 버프는 덤). 조반 영웅은 워크래프트 3과는 달리 극초반부터도 적을 잘 죽이지만, 성장이 꽤 되기 전에는 워크래프트 3보다 더 잘 죽기도 한다. 극단적으로 공속이 빠른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니시는 평소엔 귀갑차에 태워서 다니다 타이밍 좋게 내려서 폭뢰격만 갈겨줘도 된다.
또한 귀갑차에 조총병이나 와키자카를 태우면 공격속도가 빨라지고 공격력이 10씩 올라가는데, 이 때의 공격 속도 상승량이 자비가 없다. 보유하고 있는 조총병들을 쓸데없이 위험에 노출시켜서 낭비하지말고 생산하는 대로 귀갑차에 태우고 다니는 것이 좋다.
여기서도 다시금 도쿠가와와 가토가 고니시의 지략을 찬양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미츠나리는 이런 생각(빈 군량고로 낚시)을 할 위인이 못된다며 미츠나리를 까면서 역시 고니시라는 식으로 말한다. 다만 서두르면 이 대사를 보기는 어려우며, 적당히 시간을 끌 필요가 있다. 참고로, 가토의 미션상 대사는 여기서 끝.
일본의 성 중에서도 가장 큰 편에 속하기 때문에 주위를 한 바퀴 도는 것만 해도 지칠 수 있다. 오사카 성의 전시자료에 따르면 현재의 오사카 성이 에도 막부에 의해 상당 부분 축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데, 정말로 축소되었다고 가정하면 실제로는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오사카 성 부지에는 원래는 정토진종(淨土眞宗)[1]의 본산지인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願寺)가 있었다. 혼간지 세력은 천험의 요새를 구축하고 다이묘에 맞먹을 정도로 힘을 키웠으며 잇코잇키를 일으켜 오다 노부나가에 대항하였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와의 10년에 걸친 지리한 전투 끝에 이곳을 내주고 옮겨가는 조건으로 종전에 동의했다. 이 시점에 이시야마 혼간지는 불타 사라진다.
오다 노부나가 사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잡고 여기에 성곽을 건설하여 자신의 거점으로 삼았다. 히데요시가 건설한 오사카 성은 지금 남아있는 오사카성과는 다른 것으로, 훨씬 규모가 큰 성이었다. 대규모의 이중 해자가 성을 보호하고 있었다. 히데요시 사망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은 후에도 오사카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도요토미 가에 충성하는 세력의 본거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도요토미와 도쿠가와가 격돌한 1615년의 오사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승리하면서 오사카 성의 건물들은 도쿠가와 측의 화포 공격 등으로 모두 소실되었고 성의 바깥 해자는 완전히 매립되었다. 자세한 것은 오사카 전투 참고.
원래는 이랬을 거라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건축한 오사카 성을 모델로 재현.
도요토미 시대와 도쿠가와 시대 천수각의 비교.
일본 전역에 토목 공사가 성했던 에도 시대 초기, 에도 막부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명으로 오사카성은 1620년부터 1629년에 걸쳐 재건되었다. 이른바 천하보청[2]의 일환. 비용은 다이묘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마련했다. 도요토미 가문의 성벽과 해자를 파괴하고 그 위에 새로운 석벽을 쌓아 옛 흔적은 사라졌다. 니노마루와 산노마루의 해자를 매립하면서 성의 전체 규모는 4분의 1 정도로 축소되었지만 원래 높이 약 40미터이던 천수각은 새로운 위치에 58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완성했다. 지금의 55미터 높이 천수각보다 더 큰 규모. 혼마루의 지반도 한층 돋워 더욱 웅장해 보이도록 했다. 이 정도의 대역사를 벌인 것은 오사카가 라이벌인 도요토미 가문의 중심지이기는 했지만 이미 서일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거대한 도시로 성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도쿠가와 막부가 오사카 일대를 직할지로 만든 것을 보면 이러한 점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런데 에도 막부가 오사카 성을 허물고 성을 새로 재건했다는 사실은 에도 막부 중기에 들어서면 잊혀지고, 쇼와 시대까지 사람들은 이 성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1959년의 학술 조사 과정에서 에도막부가 다시 건축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오사카 관서 지방 사람들이 충격을 받을 것을 염려해서 그 발표를 주저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쇼군은 에도에 머물렀으므로 정치 무대에서 오사카가 부각되는 일은 없었다. 19세기에 막부 대신 천황을 받드는 존왕양이파가 서일본을 중심으로 세력을 얻으면서 다시금 떠오르기 시작했는데, 도쿠가와 이에모치는 조슈 정벌 도중 이곳에 머무르다가 사망했으며, 대정봉환 이후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오사카 성에 잠시 들어온 적도 있다.그러나 반대파를 피해 배를 타고 에도로 도망쳤다.
재건 후에도 여러 번 화재를 겪어 수리를 해야 했으며, 결국 1665년에 낙뢰로 인해 천수가 소실되었다. 그 뒤로는 오랫동안 성이 재건되지 못하다가 근대에 와서 성터에 일본육군 오사카 조병창과 제4 사단의 건물들이 들어섰으며, 1931년[4]에야 철근 콘크리트로 재건되었다. 1~4층은 에도 막부 시절의 양식을 따라 벽에 회칠을 했지만 5층은 도요토미 시절의 양식을 따라 검은색과 금색을 둘렀다. 꼭대기 층만 뭔가 다른 것은 이 때문.
1945년 3월 9일에 일어난 도쿄 대공습이 일어난 지 4일 뒤에 오사카에 미 공군이 네이팜탄을 쏟아부어 이 성도 오사카와 함께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즉 현재 오사카 성은 종전 이후에 다시 지어진 거다.
지금의 오사카 성은 겉으로는 그럴 듯 하지만 실체는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엘리베이터까지 들어가 있다. 외관은 화려하지만 실은 4층까지는 도쿠가와 시대 ,5층은 도요토미 시대의 천수각으로 혼합하여 복원해 고증오류가 심하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외관만 성이고 내부는 현대라고 말한다. 내부의 전시공간은 유물 내용도 다소 부실하고 사진촬영도 금지되어 있어 차라리 주변에 있는 오사카역사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천수각 자체는 오사카시에서 운영하는 박물관이며 전시는 부실하지만 거기서 파는 전시도록은 꽤나 훌륭한 편이다.
천수각 주변에는 옛 오사카 시립 박물관 건물이 있는데, 원래는 오사카 성에 자리잡았던 제4사단 본부 건물로, 현재는 기념품 가게와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다.[5] 오사카 성은 천수각은 제외하고 바깥만 구경하며 군것질만 하고 거니는 것도 괜찮다. 유물 설명은 거의 대부분이 영어가 병기되어 있고, 한글 설명이 있는 유물도 있다. 그러나 일부 한국인 정서에 거슬릴 만한 유물이나[6] 도록은 영문판은 있는데 한국어판이 없다(...). 오사카 전투에 관한 전시물도 꽤 있는데, 특히 마쓰다이라 다다나오 부대가 사나다 유키무라의 부대를 향해 돌격하는 장면을 묘사한 병풍과 그것을 재현한 미니어쳐 작품이 유명하다.
그 외에도 구로다 나가마사가 그리게 했다는 오사카 전투 여름의 진 그림을 설명하는 스크린도 있는데, 한국인에게 생소한 일본 전국시대 말기오사카 성 전투에 참전한 무장들의 그림을 하나 하나 확대해가면서 설명해주는 데다가 일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설명이 잘 되어있으므로 보는 맛이 있다. 이 그림에 대한 설명만 제대로 봐도 600엔이 아깝지 않다. 하지만 박물관의 특성상 설명이 느리게 지나가기 때문에 지루해서 지나가는 관람객도 많다(...)
그냥 공원은 무료 입장이지만 천수각에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한다. 입장료가 성인 600엔. 중학생 이하 무료(신분증 제시해야함). 천수각 3~4층 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불가능하다. [7]
일본 성의 진면목을 보고 싶다면 차라리 JR그룹 신쾌속으로 40분쯤 걸리는 히메지 성이나 조금 마이너하지만 더욱 잘 보존되어 있는 히코네 성으로 가자. 가까운 교토에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니조 성이 있지만 니조 성의 천수각은 소실된 상태이므로 천수각의 화려함을 감상할 수는 없다.[8]
한편 오사카 성 주변의 해자를 감상하고 싶다면 타니마치4쵸메역 보다는 오사카 비즈니스파크역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지나다니는 사람수가 매우 적기 때문에 사진 촬영 시 방해받을 일도 없고, 멀리서부터 천수각을 사진을 담을 수 있다. 오사카 성 내 해자에서 배를 타고 관람할 수 있는 오사카 성 고자부네도 오사카 비즈니스파크역 쪽이 훨씬 가깝다. 오테몬 방향보다 지하철역이 더 가깝기도 하고.
매해 8월 말에는 오사카성 등불축제(城灯りの景, しろあかりのえ)가 열리는데 오사카성을 은은하게 비추는 서치라이트와 소원을 비는 등불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볼거리를 자아낸다. 또한 2010년부터 오사카 맛집 경연대회를 같이 실시한다. 맛의 고장으로 유명한 오사카의 유명한 맛집들이 모두 모여 경연대회를 하기 때문에 꼭 참석해야 할 축제중의 하나.
시티즈: 스카이라인라는 도시건설 게임으로 오사카 성과 공원을 그대로 재현한 용자가 있다! 도심 사이로 지나는 케이한 본선까지 재현되었다. 오사카성 공원과 그 뒤로 보이는 우메다 도심의 야경이 압권. 우메다가 뭔가 모르게 로스엔젤레스스럽지만 무시하자
용과 같이 2편에서는 12장 막판 스테이지로 나온다. 그런데 성이 반으로 갈라진다거나 내부에 함정이 설치되어 있는 등의 무리수적인 요소로 인해 욕을 먹었다. 이 파트는 2편을 리메이크한 용과 같이 극 2에서도 변함없이 나왔다.
오사카 성 공원 내에는 1만 6천명 정도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상당히 큰 규모를 자랑하는 오사카성 홀이 있어서 주요 콘서트가 자주 열린다. 돔구장처럼 생긴 외관 때문에 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오사카돔으로 착각하기도 하는 홀이다. 오사카성 홀에서 가까운 역은 시영 지하철 나가호리츠루미료쿠치선의 오사카 비즈니스파크역.
[1] 일본 무도관에서 공연한다는 건 일본 음악시장, 일본의 음악계에서 메이저 진입을 의미한다.
[1] 일본 역사서나 소설에서 자주 보이는 일향종(一向宗)의 원래 호칭이다.[2]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압박하기 위해 성을 쌓고 도시를 정비하도록 명한 것이 시초이다. 도쿠가와 막부의 오사카 성 천수각은 이러한 건축 붐의 절정.[3] 당시의 건축법상 방화, 내진 등을 이유로 목조건축이 제한되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천수각 부분은 현대건축에 속한다(...).[4] 쇼와 금융 공황에다 1930년 만철 적자 누적으로 일본의 불황이 심각하던 해. 토목 건설로 경기를 살리려는 시도였을지도[5] 건물은 1931년 천수가 재건과 함께 성내의 사단 본부대 소속 건물들을 집약하면서 건축되어, 1948년부터 1958년까지는 오사카부 경찰청사로 이용되었으며 1960년 이후 박물관으로 변경되었다. 2001년 이후 오사카 역사 박물관 개관과 함께 폐관되었다.[6] 예를 들면 울산성 전투에서 노획해왔다는 조선 두정갑과 승자총통,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유재란 지시 명령서 등...[7] 스룻토 간사이 패스를 제시하면 500엔이다. 2014년 이후 아베노믹스로 인해 100엔당 1050원도 안 되는 상황이 지속되어 많이 저렴해진 편으로 특히 오사카 주유패스를 사용 시 무료로 입장가능하다[8] 대신 니조성은 니노마루 궁전의 화려한 외관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성 내 궁전의 실내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 또한 정원이 아름다우므로, 정원덕후라면 니조성을 꼭 가도록 하자. 오사카 성의 니시노마루 정원 따위와는 비교를 불허한다.애초에 니시노마루 정원은 벚꽃철이 아니면 그냥 잔디밭&사진포인트[9] 1부는 '나니와 검사' 사건이고, 2부는 '타이코 성'이다.
1. 나고야 성 동쪽에 있는 곡창지대를 점령하라(가토는 살아야 한다). 2. 나고야 성 서쪽과 남쪽에 있는 군량창고(시장)을 파괴하라(가토는 살아야 한다).
브리핑에서 송응창이라는 명군 장수가 처음으로 언급되는데, 아사코에 의하면 요동을 통치하는 자라고 한다. 송응창은 사신으로 온 가토가 가져온 도쿠가와의 서신을 보고 왜에는 분수도 모르고 날뛰는 못생긴 원숭이만 있는 줄 알았는데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 장군도 있다며 바로 본국으로 돌려 보내는데, 가토는 밀려오는 분노도 참으며 일을 완수했다고 한다. 이어 도쿠가와는 나고야와 오사카를 동시에 치는 양동작전을 짜는데, 자신은 아사코와 함께 이시다의 본성인 오사카를 공격하고, 점령이 아닌 군량 약탈을 위해 가토에게 창고가 있는 나고야에 공격 명령을 내린다.
본진은 자원이 조금 부족한 편. 잘만 한다면야 본진 자원만으로 클리어가 가능하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적 세력은 중앙, 3시, 9시가 있으며, 중앙은 절대 건드리지 말자. 망루로 도배가 되어있어서 통과가 거의 불가능하다. 9시, 3시에서 공격을 들어오지만,[7] 3시의 적은 병력 구성도 방어도 약하기 때문에 3시를 한 부대 가량의 병력을 모아 없앤다. 가면서 중앙의 적에게 어그로가 끌리지 않도록 조심하자. 적절하게 3시를 밀 때 창고는 깨지말고 닌자로 점령하면 더 좋다. 그 후 3시에서 자원도 좀 캐며 가지고 있는 병력으로 6시를 친다. 6시의 적은 매우 약하므로 3시를 없애고 병력이 거의 없는게 아니라면 여세를 몰아 바로 쳐들어가도 무방하다. 9시에는 적 망루가 많아 좀 강력하다. 하지만 충실히 1부대 반에서 2부대 정도의 병력을 모아서 치면 밀 수 있다. 설령 실패해도 적은 망루를 추가하지 않으므로 계속 공격하다보면 이긴다. 상점에서 용기린갑옷처럼 휘하 병력에 버프를 많이 주는 아이템이 나오면 사두는 게 좋다. 이외에도 아이템은 잘 사두면 해될 것이 없다.
적의 창고를 완전히 털어본 가토는 창고가 텅텅 비었다는 것을 깨닫고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고니시의 계략. 본 게임에서는 고니시를 지장 타입 캐릭터로 밀어준다. 반면 미츠나리는 취급이 영 좋지 않은 편.
여담으로, 이 미션이 일본 미션들 중에서 도쿠가와군으로 플레이하게 되는 마지막 미션이다. 7장 이후부터 일본 미션들은 줄창 미츠나리군으로만 플레이하게 된다. 그나마 장점이라면, 병력 생산 및 공격하는 것은 이시다 군부터가 유리해짐과 동시에 장수도 이 쪽이 더 쓸 게 많다.
가토는 무사히 명으로 떠났고 남은 건 고베를 탈환하러 온 서군을 저지하는 일. 하지만 가토도 금방 돌아와 다시 합류한다.
시작하면 아사코가 방어가 허술한 북쪽을 치자고 한다. 병력을 조금만 모으면 한 부대 가량으로도 쉽게 북쪽을 밀 수 있으니 최대한 빨리 밀어보자. 처음 있는 망루들은 다 해체해버려도 무방하니 해체 후 생산건물을 늘려 병력이나 뽑자. 12시를 섬멸한 후 확장을 할 필요는 없지만 원한다면 해도 좋고, 병력을 계속 뽑아가며 적을 싹 쓸어버리면 끝이다. 3시의 적이 플레이어 본진으로 쳐들어오다가 멍청한 인공지능의 한계로 인하여 막다른 물가에서 병력을 흘리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특히 가끔씩 영웅이 그 막다른 길에 끼어버려서 멀뚱멀뚱 서 있는 일이 간혹 일어나기도 한다. 물론 이런 일이 없어도 쉽게 깰 수 있는 임무이다. 병력을 모으다보면 6시에서 가토와 그의 병력이 등장한다. 그러나 보라색의 망루 3개가 가토의 병력을 손상시키니 가토의 병력을 멀쩡히 데려오고 싶다면 6시의 망루를 먼저 제거하는것도 좋다. 그러나 닌자로 적의 대장간을 점령해도 철갑탄 개발만 가능할 뿐 귀갑차 생산이 불가능하다. 사실 가토의 병력 중 귀갑차가 있긴 하지만 이 미션에선 대장간을 점령하게 되면 그냥 해체하는 것이 좋다.